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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Feb 23. 2017

단지 세상의 끝

문득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본다.

내가 벌써 세상에 태어난 지 n년이 지났구나.


사람으로 태어난 내가 나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그동안의 시간과 세상을 생각해본다. 내 세상의 시작은 무엇이었나? 내 역사의 태초에는 역시나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자각한다. 태어나 제일 처음으로 만난 세상은 엄마 아빠 그리고 형제다. 이들은 나와 '가족'으로 엮인 사람들이다. 존재의 시작이 '생'이라는 형식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는, 제 아무리 태초의 시작을 여타의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의미화하려 한들 "응애" 하고 울부짖으며 누군가의 품에서 날 것으로 태어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엄마 아빠 사이에서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 단수 혹은 복수의 가족이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다.


그리고 삶을 포기하거나 이별을 고해야 할 때가 오면 다시 또 가족을 생각한다. 나는 아직 경험해 본 순간은 아니지만 <단지 세상의 끝>은 바로 그런 '인생의 수미쌍관'을 이루려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왜 인간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 환상이 아닌) 나와 관계 맺은 가족에 대해 생각을 하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나열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만 굳이 하자면 다음과 같다. 죽음을 앞둔 남자는 이 죽음을 의무적으로 가족에게 알리기 위해, 혹은 불현듯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12년 만에 가족들을 만나러 간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이지만 서로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엉뚱한 얘기를 반복해서 하기도 하고 궁금해하지도 않을 이야기를 왠지 궁금해할 것 같아서 상대방에게 한다. 상대를 배려한답시고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라고 오해한 것 같다).


세월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원래가 맞지 않는 다른 성향의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가족들은 서로 자기 이야기만 한다(영화 내내 남자와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은 핏줄의 가족이 아닌 바깥에서 온 타인-형수님이란 사실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남자와 형은 모종의 앙금 때문에 말싸움이 일어나고 엄마는 그 싸움을 말린다. 가족들은 다시 남자에게서 거리를 두기로 한다. 그리고 남자는 다시 가족을 떠난다.



이 놀라운 제목의 영화 <단지 세상의 끝>은 나의 세상의 시작과 끝에 있는, 그리고 사실상 그 끝과 끝을 연결한 인생의 한줄기 선에는 가족이 있다는 걸 인생의 한 순간을 뚝 떼내어 짧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한줄기 선은 오롯이 나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존재가 인생이라는 선의 틈새마다 새겨져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단지 세상의 끝>에도 서사는 존재하지만, 사실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가족에 대한 아주 보편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나 다름 없다. 이런 보편적 의미를 함축하려는 목표를 가진 <단지 세상의 끝>의 메타 서사는, 그래서 가족과 관련되어 있는 인간의 메타 서사를 이야기하는 지경에 이른다.


가족이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윤리적인 개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가족이란 존재는 어째서 서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까지 서로 이해하려 하고 소통해야만 하는 존재여야 하는 것인가?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영상-이미지를 철학의 필기도구로 쓴 과거의 감독들은 초현실주의라는 형식을 지극히 장치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와는 달리 <단지 세상의 끝>은 정말로 인생에 있을 가족들과의 시간들-생활 언어를 쓰며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을 그대로 가져와서 보여준다. 그 시간들 자체가 바로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가족이라는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조금 안타까운 것은 감독의 자의식 과잉인지, 사실주의 문학에서 차용한 것인지 대화의 어떤 순간들은 너무 과하게 말이 많아서 일종의 스타일을 노린 것 같기도 하였다). 유달리 이 영화에 대화가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지나온 시간(과거)의 설명이 많고, 굳이 가족을 물질적으로 형상하는 '집'에 대한 내용을 오프닝 음악의 노래 가사로 노골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감독의 일관된 의도일 것이다.


나는 가족에 대해서 생각을 할 때면 대부분 슬프거나 그리움이 크다.

그렇지만 정작 가족을 만나면 '서로 맞지 않음'이라는 결론에 이른 채 그들을 떠나온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가족을 만나러 가는 남자의 독백은 그래서 정말로 나의 가슴을 푹 찔렀다. 수많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하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가족이란 여전히 나를 혼자이게 하는, 혼자가 되고 싶게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인생엔 누가 뭐라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수없이 존재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수없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 오랜 시간 끝에 내 발자취를 되짚어가기로 했다. 나의 죽음을 알리기 위한 여정을,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 환상을, 보여 주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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