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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Apr 09. 2017

훈훈한 가족시네마일까? <토니 에드만>

가족이 나오는 영화라고 하니 왠지 또 하게 되는 것 같은 말. 가족 간 에피소드를 다루는 영화는 보편적인 관계에서의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에 국적과 시대를 불문한 공통 감각을 (정말 조금이라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런지 빠른 몰입과 자발적인 재해석을 유도한다. 공감도 그만큼 빠르게 다가오는 것 같다.


이런 빠른 공감 덕분인지, 가족 영화의 끝에 그려지는 '훈훈함' '가족의 소중함' 같은 감정도 마치 내가 극의 주인공이었던 것 마냥 그 모든 갈등을 내가 해결해서 얻은 성취인 것처럼 느껴진다. 지지고 볶고 싸우고 삐쳐도 가족은 가족이다.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이 그러한 것처럼. 


이런 훈훈함을 암시하는 것 같은 <토니 에드만>의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았다.


당신의 삶을 감싸 안을 아주 따뜻한 포옹.


<토니 에드만>은 살아가는 스타일도 성격도 다른 아버지와 딸이 갈등을 겪다가 결국에는 화해를 해서 끝나는 영화다. 시종일관 진지하고, 항상 무언가를 하느라 바쁜 커리어우먼 (왠지 페미니스트의 냄새도 풍기는) 딸이 있다. 이와 반대로 근거 없이 항상 엉뚱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장난을 일삼으며, 도무지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아버지가 있다. 이런 둘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토니 에드만>은 할머니의 장례를 계기로 가족의 의미를 새삼 소중하게 깨달으면서 극적인(?) 포옹과 못 다했던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훈훈하게 끝이 난다. 


정확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토니 에드만>의 '거의' 마지막은 이런 훈훈한 분위기의 액션을 취한다. 화해란 역시나 아름다운 것이며, 서로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다고 말이다. 아버지와 딸은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세대로 살아왔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리고 상대방의 환경에서 살아보고 생각해본다면 서로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엄밀하게 이야기하자면 바로 이 같은 환상을 보여주는 듯하다가 도중에 끊어버린다).


이런 공감을 증명하려는 듯, <토니 에드만>은 아버지가 딸에게 끊임없이 다가가는 상황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딸이 일하는 환경에 느닷없이 침투해서 시종일관 느닷없는 장난을 친다. 딸은 내내 그 느닷없는 장난을 불쾌해한다. 그런데 불현듯 이 불쾌함이 전부였던 딸은 아버지가 그랬던 방식처럼, 느닷없이 타인에게 위트 섞인 커뮤니케이션 방식(누드 파티)을 시도한다. 이렇게 해보니 서로는 서로를 이해한 것 같기도 하다. 왜 아버지는 위트와 유머를 시종 이야기하고 왜 딸은 시종 진지할 수밖에 없었는지 말이다. 




사실 이러한 결말의 설명은 굉장히 거시적인 맥락에서만 이야기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무언가 갑자기 이렇게 잘 풀린 것처럼 해석되는 것도 찝찝함을 남긴다. 바로 '생일파티-누드 파티' 시퀀스의 몇 가지 이유들 때문이다.


누드 파티 시퀀스는 아버지와 딸의 갈등을 해소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는 것으로 맥락상 존재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바로 그 누드여야만 초대받을 수 있는 곳에서 몸과 얼굴 전체를 다 가리다 못해 털로 뒤덮인 옷과 탈을 쓰고 등장한다. 아버지가 가상의 인물인 '토니 에드만'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장면에서 가발을 쓰고 어울리지 않는 슈트와 틀니를 끼고 있어도 아버지는 언제나 직접적으로 소통하려 하였고 그 소통의 행위가 직접적으로 닿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수다를 떨었다. 시종 이런 행동을 취했던 아버지가 유일하게 털옷과 탈을 쓰고 등장하는 누드 파티 시퀀스는 결국 아버지는 딸의 생일파티에 초대는 받았지만 동일한 방식으로는 서로가 동일하게 소통할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한다. 


생일파티 현장에서 말 없이 빠져나온 털옷 입은 아버지를 딸은 뒤쫓아 온다. 그리고는 예의 그 '포옹'을 갑자기 하면서 아름다운 결합을 시도한다.

여기서 우리가 예상대로 아버지와 딸이 아름답게 화해를 하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내내 그랬던 방식처럼 탈을 벗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토니 에드만'으로서의 역할극이든, 아버지로서 딸에게 건넬 수 있는 이야기이든, 가족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 깊을 수밖에 없는 생일 축하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하지만 이 둘은 포옹과 잠깐의 술래잡기 장난을 칠 뿐, 다시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오히려 아버지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뒷모습을 유난히 길게 보이면서 눈물을 훔친다. 그리고 익숙한 딸의 거처가 아닌 어딘지 알 수 없는 호텔 프런트에 가서 호텔 직원에게 탈을 벗겨달라고 부탁한다. 아버지는 결국 딸의 집에 머무를 수 없고 엉뚱한 곳에서 탈을 벗는다. 딸은 결국 태어났다는 사실과 그로부터 계속되는 삶,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아버지와 진짜로 하지 못한다.


정말 갸우뚱하는 부분은 <토니 에드만>의 마지막 장면에 있다. 그래서 '진짜' 마지막은 정말로 마지막 씬에 나타난다. 할머니가 부고로 장례에 참석한 부녀. 마치 화해가 다 이루어진 듯 아버지는 딸에게 삶에 여유가 필요한 이유를 이야기한다. 딸은 그 이야기를 듣더니, 갑자기 아버지의 틀니를 입에 끼고 할머니의 유품인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다. 딸은 위트를 탑재한 채 미소를 보인다. 바로 이 장면을 카메라로 찍기 위해 아버지가 잠시 카메라를 찾으러 화면에서 나간 순간, 딸은 모든 웃음과 화해를 걷어내고 정색의 얼굴로 틀니와 모자를 벗는다. 딸이 이 모든 것을 벗은 순간 <토니 에드만>은 갑자기 끝난다. 그리고는 화해로 거의 다 매듭지어진 우리의 마음을 갑자기 갸우뚱하게 만든다. 거의 무르익은 화해의 광경에서의 딸의 정색은 바로 그 창백한 표정처럼,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보라는 듯한 느낌으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모든 '가족 드라마'는 '훈훈한 가족 시네마'인가? 배경은 그럴 수 있겠지만 주제는 꼭 그렇지는 않다. <토니 에드만>의 포스터는 극적인 포옹의 제스처가 화해를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궁극의 메시지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정색과 무표정에 있는 것 같다. 트릭이라고까지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토니 에드만>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이 같은 포스터의 외피를 벗겨내고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가족 드라마'라는 보편 서사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혹은 적당히 가림 처리되었던 콘텍스트를 생각해본다. 아니, 당장 나의 가족을 생각해본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충돌하는 지점을 생각해본다. 세대차이도 있고 성격차이도 있다. 이런 차이들은 하필이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존재하는 바람에 정말이지 수시로 충돌한다. 이럴 땐 아빠 혹은 엄마, 혹은 자식이라는 위치를 인식하면서 때로는 양보도 하고 때로는 절충을 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들을 훈훈하게 마무리하고 서로의 감정도 잘 결합이 되면 이는 '가족시네마'의 모습으로 결말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토니 에드만>도 마치 그런 영화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다. 하지만 화해가 아닌 모습도 가족에게는 존재할 수도 있고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렇게 정색이라고 보이는 모습 또한 가족 영화가 반드시 다루어야만 하는 가족 '간'의 관계일지도 모른다. 


가족 간의 갈등은 언제나 관계의 절대적인 갈등에서만 시작되지는 않는다. 가족의 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며 신념도 다르다. 둘 이상의 세대가 결합된 가족이라는 통시적인 틀에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어쩌면 가족이기 때문에 더욱 다루어야만 하는 주제인 것 같다. <토니 에드만>을 다시 본다면, 아버지가 보여주는 그 많은 재미난 장면들이 씁쓸하게 보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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