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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Apr 23. 2017

<상하이, 여자의 향기>

상하이의 풍경이 흑백 보도사진처럼 보인다

어떤 도시에 오래 살거나 오래 머무른다고 해서 그곳의 숨결에 온전히 젖어들 수는 없을 것이다. 도시가 마치 사람과 같이 자기 자신의 역사와 기억을 품을 수 있고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지금의 숨결과 향기를 가지게 될 수밖에 없는 사건들, 이야기들이 도시의 안팎으로 쌓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도시의 생활인이 토박이가 되어 그곳을 익숙하게 아는 문제 하고는 좀 다른 것 같다. 막연하게 오래 살고 오래 지내다 보면 토박이가 될 수는 있다. 어디에 무엇이 있고 어디에 누가 살고 있으며, 어디에 가면 어떤 것을 찾을 수 있는지를 다 외워버리게 되니까 말이다. 


단순히 도시에서 지금을 사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 함께 쌓인 나의 시간과 기억을 역사라는 형태로 이해하고 생각해보자는 것을 <상하이, 여자의 향기>라는 책은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태도를 객관적인 역사를 통해 읊어 내려가는 식으로 보여주면서도, 개인이 경험한 상하이를 매우 사밀하게 이야기한다.


나에게는 서울이라는 공간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일까? 문득 생각해 본다.




저자는 시간의 익숙함으로는 가질 수 없는 도시의 역사-상하이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굳이 번역서의 제목은 '향기'라는 단어가 붙어서 역사의 깊이에 왠지 서정적인 느낌을 곁들였는데, 사실 이 책은 원제가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의 성별과 제목에서 풍기는 느낌이 어떤 '관점'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해서 조금은 불편한 마음으로 시작한 책이기는 하다.


 <男人和女人, 女人和城市>가 원제인데, 오히려 이런 원제를 살리는 것이 이 책이 가진 시간의 깊이를 더 잘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상하이의 역사적 풍경이 내내 펼쳐지는 이 책은 단순한 풍경이라기보다는 '그곳에서 내내 살아온 자기 자신과 과거 상하이 사람들의 역사를 탐구'하여 이어붙인 그림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에 대한 아쉬움이 처음부터는 조금 시작되었는데, 왜 번역서의 제목은 원제와 다르게 붙게 되었는지는 책을 읽다 보면 깨닫게 되기는 한다.


역사적 풍경이라는 인상 때문에 그저 딱딱한 내용인 것 같지만, 사실 <상하이, 여자의 향기>는 상하이에서 듣고 배워온 풍경의 재구성, 경험한 역사를 다시 쓰는 것에 문학적인 색채가 끊이지 않고 내내 이어지는 책이다. 그래서 그런가? 번역서의 제목은 다분히 서정적이고 목가적인데, 그러니까 이건 의도된 번역인 것 같기도 하다. 구체적인 상하이의 풍경이 마치 흑백 보도사진처럼 묘사되어 있으면서도, 이 책에는 글 쓰는 일을 하는 사람 그리고 여자라는 자의식이 글쓰기의 모태가 되는 듯한 왕안이 작가의 성향을 따라서 문학적인 레퍼런스와 색채가 진하게 배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상하이, 여자의 향기>라는 제목은 왠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상하이는 무언가 무시무시한 빌딩과 외지인들이 가득한 곳으로 기억되는 곳이다. 그리고 왠지 미래를 향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곳이기는 하다. 발음에 '얼화'가 별로 들리지 않는 상하이 사람들의 무언가 세련된 표준어 발음을 들을 때면 늘 그런 생각을 했다. 다시 가볼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또 가보게 되면 그 어디보다도 빠르게 역사를 다시 쓰고 다시 쓰는 상하이에 또 놀라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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