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한다는 핑계로 군대를 미루고 미루었던 내가, 결국은 군대에 가기 직전이었다. (나는 4월에 군대를 갔다) 그래서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그런 나의 꿀꿀한 기분과는 전혀 별개로, 그때 미국은 파워볼 열풍이 한창이었다. 오피스에 altoids가 다 떨어져 세븐일레븐에 갔더니 학부생 여럿이 복권을 사고 있었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이 번호로 할까 저 번호로 할까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한 장 사서 인생 역전을 노려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돈 없는 학부생들도 없는 돈 아껴가며 파워볼을 사는 이유는 1등 상금이 말도 안 되게 엄청나기 때문이었다. 1등 당첨금은 한화로 1조(!) 원 이었다. 미국 역사상(그리고 당연하게도 세계 역사상) 최고 당첨 금액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숫자를 적어넣는다
수학자적 직업병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런저런 상황들을 나름 수학적으로 분석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 분석에 의하면, 복권을 사는 것은 멍청한 행동이다. 복권을 사는 학부생들을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거짓말 조금 보태 얘기하자면 사실 복권이라는 건 정부가 국민이 낸 세금(+부모님의 피 같은 돈)으로 시켜준 의무교육, 특히 수학 시간 때 잠만 쿨쿨 잔 세금도둑(?) 들에게 부과하는 벌금 같은 거다. 말하자면, "수학 바보세"랄까?
일반적인 복권은 매우 높은 당첨금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이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어, 버벌리 힐즈의 집도, 람보르기니도, 잘생긴 남자 친구도, 예쁜 여자 친구도, 어쩌면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말 그대로 흙수저에서 바로 울트라 합금 다이아몬드 수저로 부스팅 한다. 대륙의 웅대한 기상을 갖춘 파워볼의 그 회차 당첨금은 1조. 상상조차 안 되는 돈이다. 이 돈이 얼마나 큰돈일지 간단히 예시를 들어 설명해보자.
1조만 있으면 포르셰도, 람보르기니도, 부가티도, 벤틀리도 다 살 수 있다!
1. 브런치의 모회사인 카카오의 19년 8월 14일 시가총액은 11조에 약간 못 미친다. 1조라면 카카오 주식의 약 10퍼센트를 현금박치기로 살 수 있는 돈이다. 물론 1조를 한 번에 시장에 푼다면 시장이 감당할 수도 없겠지만, 뭐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카카오는 코스피 시가총액 순위 26위니까, 대한민국의 웬만한 회사의 최대주주, 적어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주주가 될 수 있는 거다. 대출 한 푼 안 끼고.
2. 조금 더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보자. 대주주니 시가총액이니 그런 게 다 뭐람.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1조를 벌려면 1년에 10억을 받는 초고소득자(회사의 임원, 잘 나가는 의사/변호사 등등)가 1000년 동안 일해야 한다. 지금부터 1000년 전이면 서기 1019년, 고려 현종 10년, 또는 북송 진종 22년이다. 바로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에서 이긴 해다. 그때부터 한해도 거르지 않고 10억씩 벌어야 하는 거다. 1년에 1억을 버는 고소득자의 상황은 그것보다 더 비참하다. 그는 1만 년을 일해야 하는데, 이때 지구는 방하기를 겪고 있었고, 이제 막 탄생한 호모 사피엔스들이 호모 에렉투스니 네안다르탈인이니 하는 아종들을 절멸시키고 있었다. 그때부터 뼈 빠지게 1년에 1억씩 벌어야 한다.
이 설명을 듣고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와, 그런 돈을 한 번에 받는다니. 놀랍다. 복권이나 사야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바보세를 내게 되는 거다. 우리는 '기댓값(expected value)'을 생각해야 한다. 기댓값이 무엇인지 간단히 복습하자면, 그것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평균적으로 벌 것이라고 생각되는 금액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동전 던지기를 했을 때 앞면이 나오면 1만 원을 받고, 뒷면이 나오면 2만 원을 내야 하는 게임을 생각해보자. 이때의 기댓값은 (동전의 앞뒤면이 나올 확률이 동일하다고 가정했을 때)
(앞면이 나올 확률) X (앞면이 나왔을 때 받는 돈)+ (뒷면이 나올 확률) X (뒷면이 나왔을 때 받는 돈),
즉 1/2*10000+ 1/2*(-20000) = 5000-10000 = -5000원인 것이다.
이 숫자의 의미는, 이 게임을 충분히 오래 한다면, 평균적으로 매 게임당 5000원을 잃는다는 말이다. 그러니깐, 이 게임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게임인 거다.
대부분의 경우 비록 당첨금은 많을지라도, 복권을 살 때의 기댓값은 마이너스다. 그러니까, 확률적으로 보자면 돈을 길바닥에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길바닥에 버린 돈의 일부를 정부가 가지고 가서 여기저기에 사용하는 것이다.
당시 파워볼-경쟁상대인 메가 밀리언의 1등 상금도 1000억이 넘음에도 불과하고 아무도 메가 밀리언은 사지도 않고, 언론에서도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역시, 1등이 될 확률은 약 3억 분의 1(조금 더 정확하게는 1/2억 9200만)에 불과하다.
3억 분의 1이 얼마나 작은 확률이냐면, 매일매일 점심 저녁을 굶고 (20불을 투자하여) 복권을 10개씩 8만 2000년 동안 사야 약 65% 정도의 확률로 당첨이 된다.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지금부터 8만 2000년 전이면, 뭐 대충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때다.
당첨 확률이 그렇게나 낮기 때문에, 복권 당첨금이 높더라도 기댓값은 마이너스가 된다. 다시 말하자면 확률적으로 복권을 사는 것은 손해라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복권을 사는 것이 마이너스 기댓값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나는 기댓값 계산도 하지 않고,
'멍청한 것들. 너네는 돈을 날리고 있는 거야 ㅋㅋㅋ'
정도의 생각을 하며 연구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지쟈스, 나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내가 학부생들이 복권을 많이 사고 있다고 옆에 있는 다른 수학과 친구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야 근데 당첨금이 너무 높아서 기댓값이 플러스더라?
하고 놀라운 사실을 말해줬다.
당시 상금은 9억 불(aka 1조), 파워볼 한 게임은 2불이니 (귀찮으니 2등 이하의 상금은 모두 무시하고 계산해도) 내가 복권 한 장을 살 때의 기댓값은 9억/3억 - 2 ~1. 즉, 0보다 큰 양수인 거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우승상금이 너무 높기 때문에 복권 한 장을 살 때마다 (평균적으로) 1불씩 버는 거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복권의 기댓값이 양수라는 말을 다른 형태로 말하자면 내가 복권의 모든 숫자를 다 가져서 당첨이 보장된다면, 내가 쓴 금액보다 당첨금이 더 높다는 말이다. 그러니, 시간적 물리적 금전적 제약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복권을 살 때의 기댓값이 양수이다, 하는 말은 대충 복권의 모든 번호를 다 사면 돈을 번다, 하는 말이란 거다.
물론 시간적, 공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한 사람-혹은 단체가- 3억 개의 숫자를 모두 산다고 해도 3000억 원-한 기업이 1년에 이 정도를 번다고 해도 넉넉잡아 한국 20대 대기업집단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정도의 순이익이 발생하는 거다. 이렇게 했을 경우 세금은 얼마나 제하는지 궁금하지만 (순이익은 3000억이니 3000억의 33%를 떼는 것인가? 아니면 9억 *0.33만큼의 세금을 떼는지?) 어쨌든 놀라운 일이다.
그러니까, 방금 단순 계산만으로 생각하면 복권을 사야 하는 것이었다.
수학자들(또는 교육과정을 밟은 자연과학 전공자들)에게 기댓값이 양수라는 말은 마치 비트코인의 가즈아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기댓값이 플러스라니. 참. 가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도.
하지만 내 앞자리에 앉았던 친구가 흥분한 채 복권을 사러 연구실 밖으로 나가려는 우리들을 잡아 세우고는,
너네들 바보니? 두 명이 당첨되면 당첨금을 1/2로 나눠야 하잖아,
하고 말했다. 맞다. 진짜 복권을 사는 것이 이득인 걸까? 복권을 사러 집 앞 편의점으로 뛰어가기 전,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보아야 했다.
파워볼은 그 특성상 중복 당첨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비록 내가 3억 분의 1이라는 미친 확률을 이겨내고 당첨이 되었다고 해도, 만약 나를 제외한 당첨자가 한 명 더 있을 경우 나는 9억 불의 반인 4억 5천 불밖에(?) 받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복 당첨이 있을 경우 (복권의 모든 숫자를 다 사서 손에 들고 있는) 나의 손해액은 (모든 숫자를 사는데 쓴) 6억- (당첨금) 4.5억 = 1.5억 불. 한화로 약 2000억 원이다. 대충 동방박사 세명이 성스러운 빛을 내는 별을 발견했던 시절로 돌아가 1년에 1억씩 벌면서 현재까지 빚을 갚으면 된다. (2000년 동안 빚을 갚는 것만 해도 너무 불쌍하니 이자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내 첫 계산의 문제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 역시 복권을 사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만약 파워볼이 나 혼자만의 게임이었다면, 복권을 모두 사는 것이 이득이겠지만, 수천, 수만 명의 사람이 일확천금의 일장춘몽을 꾸며 복권을 살 것이었다. 그것도 한 사람당 수십, 수백 불어치를. 대충 3억 개의 복권이 팔렸다고 가정할 시, 당첨자가 아무도 나오지 않을 확률은 (1-1/3억)^3억. 수학 시간에 초월수 e의 정의를 배운 사람이면 쉽게 계산할 수 있는 숫자인데, 대충 1/e ~ 36% 정도가 된다. 그러니까 64%의 확률로 적어도 한 명의 1등 당첨자가 나오는 것이다. 학교 주변 세븐일레븐에도 파워볼을 사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것으로 보아 적어도 3억 장은 안 팔릴까 하는 생각을 해 보는데, 이런 경우 내가 당첨된다 하더라도 64% 정도의 확률로 피 같은 당첨금을 나눠야 한다는 거다. 이런 경우의 수까지 계산을 했을 경우, 복권 한 장의 기댓값은 마이너스다. 즉, 당첨금을 30년에 걸쳐 연금 형식으로 1년에 300억씩 받는다 해도- 복권은 사지 않는 것이 이득인 것이다.
그렇다 해도 1조 원이라는 숫자는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한 숫자인 듯하다. 당첨만 된다면 바로 한국 10대 재벌의 재산에 근접하게 되니까. 아니, 재벌들의 재산은 대부분 주식이니, 현금성 재산으로만 따지자면 한국에서 톱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젠장, 기댓값이 마이너스잖아. 그럼 복권을 사면 안 된다. 결국 수학과 학생들 모두 복권을 사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회차에도 당첨자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회차의 당첨금은 놀랍게도 2조에 약간 미치지 못했다.
누군가 기댓값을 계산해 보았다. 중복 당첨자까지 고려한 매우 정교한 계산이었다. (좀 길다. 생략한다.)
이번에는 기댓값이 +였다.
그래서 어쨋냐고? 어쩌긴 뭐 어째. 모든 수학과 학생들은 손에 손을 잡고 복권을 사러 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