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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선생 Aug 22. 2023

선과 악의 이분법을 택하지 않는 용기


비극적인 소재를 다룰 때 가장 쉽게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선과 악의 명확한 이분법'이다. 쉽게 말해 악당은 동정의 여지가 없는 100% 악(惡)으로 그리고, 주인공은 그 어떤 잘못도 하지 않은 채 고통받는 100% 선(善)으로 그리는 것이다. 이럴 경우 관객은 큰 고민 없이 그리고 복잡한 생각 없이 선을 응원하고 악을 저주하게 된다.


대립하는 두 주체가 극단적으로 다를수록 관객은 크나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이는 2,000년 넘게 검증된 방식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도 늘 사용했던 방법이니 말이다.


여기서 '부정을 씻는다(깨끗하게 함)'는 말은 고대 희랍어로 '카타르시스(Katharsis)'입니다. 이 말은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어 개운해진 심정 상태를 가리킬 때도 쓰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연극 상연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중적인 의미에서의 카타르시스라 할 수 있습니다.
(...)
서로 대립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어설프게 부딪히면 개운해지질 않습니다. 감정의 찌꺼기만 남습니다. 비극이 개운함을 주려면 그 형식을 아주 극단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게 당연합니다.

- 강유원, <인문 고전 강의>, 라티오, 2010. 중 -


허구의 콘텐츠라면 이렇게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하기 위해 만든 극단적인 등장인물과 형식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작품성을 인정받지 못할 순 있어도 대중성은 담보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극단적인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본다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비극적인 사건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야만 한다. 감정의 찌꺼기는 우리에게 사회의 시스템을 개선할 동기를 부여한다. 더 나아가 본인의 생각과 행동이 욕하고 있는 악한 행동과 다르지는 않은지에 대한 성찰의 기회도 준다. 그렇기에 선악의 이분법으로 비극적인 사건을 콘텐츠로 소비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끝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들이 하나의 콘텐츠로 소비되고 있지 않나 하는 걱정이 든다. 뉴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매체는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100% 선악의 구조를 가해자와 피해자에 그대로 접목시킨다. 가해자를 옹호하자는 말도 아니고, 피해자를 동정하지 말자는 말도 아니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비극적인 사건을 비극적인 콘텐츠로 소비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냐는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도 이러한 선악의 이분법으로 그려내는 콘텐츠가 꽤 된다. 그래야 콘텐츠로서 좀 더 많은 대중에게 어필이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비극을 겪은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의 이분법을 벗어나서 이 비극적인 사건을 다루는 콘텐츠를 만날 때면 작가의 용기에 탄복하게 된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가 그러한 책 중 하나였다.


이 책은 만화책 유일의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유명하다. 홀로코스트를 겪은 아버지의 과거 이야기와 현재 작가인 아들과 가치관에서 충돌하고 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유기적으로 엮은 내용이다. 만화책이다 보니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으나 쉽게는 소화하지 못하는 무거운 내용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단순하게 나치는 가해자, 유대인은 피해자로 그리지 않았기에 생각할 거리를 수없이 던져주는 책이다. 다른 말로 감정의 찌꺼기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책이다.


이를테면 "악은 무엇이지?",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이지?", "그렇다면 나는 악을 마음 놓고 쉽게 욕할 정도로 선한 사람인가?" 등과 같이 근본적인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게 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내릴 수 없다. 살아가면서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고민할 질문들이다. 그렇기에 슈피겔만의 <쥐>가 훌륭한 책이자 지금 우리에게 더더욱 필요한 책이지 않나 생각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비극적인 사건을 비극적인 콘텐츠로 소비하고 끝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도 은연중에 그러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본다. 선과 악의 이분법을 택하지 않는 용기가 나에게는 있는지 자문해 본다.


P.S. 이런 유형의 글을 쓰면 늘 오해를 하고 댓글을 다는 분들이 있어 다시 한번 적어본다. 잘못한 사람은 당연히 법대로 처벌받아야만 한다. 이것에 다른 의견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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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Mahdi Bafa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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