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이런 말을 들었을 때과장법에 가까운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Survey of American Fears, 1973>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가장 두려운 것으로 '죽음(Death)'은 18.7%만 꼽은 반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Public speaking in front of a group of people)'는 40.6%나 꼽았다. 진짜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의 두려움'을 의미하는 Glossophobia라는 영어 단어가 따로 있을 정도니 말이다.
이는 비단 영어권 사람들만의 특징은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곳곳에서 보이니까 말이다. 대학교에서 조별과제가 주어졌을 때 가장 눈치싸움이 치열했던 순간이 언제였던가? 바로 리더를 뽑을 때와 발표할 사람을 정할 때였다.
물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할 때 두렵기보다는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분들에게는 지금 내가 하는 말은 크게 공감도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분들에게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며 Glossophobia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전하고자 한다. 장도연과 유희열을 통해 말이다.
1. 장도연의 좆밥 전략
MBC '나 혼자 산다'
유튜브를 보다가 한 강연 영상을 보게 되었다. 강연자는 코미디언 장도연이었다. 그녀가 초반부에 던진 말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그 뒤 이야기는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 말은 대략 아래와 같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설 때는 기(氣)가 필요해서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곤 해요. 나 빼고 다 좆밥이다!
장도연은 본인을 평범하고 주눅도 잘 드는 스타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 앞에 서야만 하는 방송생활을 10년 넘게 하면서 이러한 성격을 극복해야만 했고 그런 와중에 이러한 '좆밥 전략'을 만들게 된 것이다.
나도 직업 특성상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을 피할 수 없다. 마케터로서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회사를 대표해 클라이언트 앞에서 프레젠테이션(PT)을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고, 강연자로서 소중한 시간과 돈을 들여 내 모임에 오신 분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대표가 참석하는 PT다', '전문가들도 참석하는 강연이다'와 같이 참석자에 대해서 높게 그래서 어렵게 생각하는 자리일수록 그 부담감 때문인지 평소보다 말을 잘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비단 장도연이나 나처럼 남들 앞에서 말을 해야만 하는 업에 계신분들이 아니더라도 이런 점을 느낄 때가 대부분 있을 것이다. 평소에는 말을 잘하다가도 좋아하는 사람 혹은 내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평소와 달리 말을 더듬게 되고 주변을 싸하게 하는 농담을 하게 되는 것 같이 말이다.
이처럼 상대를 너무 높게 보게 되면 우리는 평소보다도 더 주눅이 들고 긴장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로 이럴 때 장도연이 그러했듯 '좆밥 전략'을 써보면 도움이 된다. 나도중요한 자리일수록 '나 빼고 다 좆밥이야'라는 자기 암시를 더 하곤 한다. 물론 상대가 모르게 말이다.
2. 유희열의 배째라 전략
KBS '대화의 희열'
개인적으로 유희열의 오랜 팬이기에 그가 어떠한 옷을 즐겨 입는지, 어떠한 포인트에서 잘 웃는지 등 여러 가지를 자연스럽게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달변인 그가 어떠한 말을 즐겨하는지도 말이다. (쓰고 보니 뭔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생팬 같은 음습한 느낌이 드는데 그렇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
그는 공연이나 공개방송처럼 여러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다음의 말을 자주 한다.
여러분이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입니다.
"아니 소중한 시간과 돈을 지불하고 온 사람들한테 이게 무슨 배째라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의 팬들은 잘 알 것이다. 그가 말과는 다르게 기대 이상의 공연을 보여줄 것이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그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관객석에서는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오고 유쾌한 분위기에서 공연과 방송이 시작된다.
이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떨릴 때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제가 조금 서툴겠지만 많은 이해 부탁드립니다"와 비슷한 말이지만 전혀 다른 뉘앙스의 말이다. 둘 다 본인의 결과물이 그리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을 일종의 보험처럼 서두에 깔고 시작하지만, 유희열은 '배째라'의 뉘앙스라면 후자는 '양해'의 뉘앙스인 것이다. 그래서 전자는 말하는 사람의 부담감을 줄여주면서 그 당당함에 듣는 사람은 오히려 기대하게 된다. 반면 후자는 말하는 사람의 부담은 내려놓을 수 있을지언정 듣는 사람의 기대치는 훼손이 되고 심지어 듣는 사람은 오히려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서툴지에 더 집중하게 된다.
즉 유희열의 배째라 전략은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말하는 사람의 부담감을 줄일 수 있는 좋은 보험 같은 발언이다. 다만 이 전략은 속으로 생각만 하는 장도연의 좆밥 전략과는 다르게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야 하기에 조금 더 주의가 필요하다. 내가 말하는 곳의 상황을 살펴야 하며, 수줍게 이 말을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날 수 있으니 '배째라'에 걸맞은 당당함이 필수다.
나도 가끔 어느 정도 라포(Rapport: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친밀감이 형성된 관계)가 형성된 집단의 강연에서는 유희열과 비슷한 류의 말로 시작을 하곤 한다. "오늘 강연 주제에 대해서는 아주 후려쳐서 알아볼 예정입니다. 그러니 정확성은 기대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강연을 시작하면 참여한 분들은 이것을 유머로 받아들이고 나는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