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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선생 Mar 02. 2022

내 삶이 영원히 리플레이(Replay)된다면?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


인생이라는 주제로 이야기 나누는 소셜모임이 있었다.


다양한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나는 무언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인생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누구도 '죽음'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어디에 갈 때 종착지를 이야기합니다. 부산이 종착지면 부산에 간다고 하죠. 하지만 우리 삶의 종착지는 죽음인데, 죽어간다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살아간다고 이야기하죠. 참 묘한 일이죠.



순간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죽음이란 단어가 그만큼이나 모든 사람들에게 회피하고 싶은 단어였나 보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낄끼빠빠를 잘 못했나?" 싶기도 하다)


어쨌든 우리가 죽어간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죽음을 회피하고 싶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 언어에 반영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하는 것은 마치 사냥꾼에 쫓기는 꿩이 몸은 다 드러낸 채 땅속에 머리만 묻고 사냥꾼이 보이지 않는다고 안심을 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어떻게 삶을 살아가느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사람과, 천국과 지옥을 믿는 사람, 그리고 환생을 믿는 사람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니체의 ‘영원회귀(혹은 영겁회귀)’ 사상이다.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는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 및 스토아 철학자들이 그 기원이 되는 사상이다. 이를 프리드리히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드라마틱하게 대중들에게 전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간략하게 알아보고 싶은 분들은 아래 링크를 참조 바랍니다)

* 후려치기 1화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영원회귀를 간단히 말하면 '현재 우리가 사는 삶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인생은 일종의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과정이고, 한 번 영화가 완성되면 이 영화는 수정 편집 없이 영원히 반복된다.


그래서 영원회귀를 믿는 순간 우리는 지금 이 삶을 영원히 반복해서 경험해도 좋을 만한 삶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영원회귀’를 믿는 순간 ‘당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실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연자 <아모르파티> 정규앨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알기 전에 나는 '때운다'는 행위를 많이 했었다. '바쁘니까 대충 삼각김밥으로 때우자', '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좀 남는데 대충 시간 때우다 가자'처럼 말이다. 그러나 영원회귀를 알고 나서는 내 인생에서 '때운다'는 단어는 지워졌다.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의해 삶이 바뀐 것이다.


공자는 ‘미지생 언지사(未知生 焉知死)’, 즉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까?’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미지사 언지생(未知死 焉知生). ‘죽음도 모르는데 삶을 어찌 알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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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Hannes Wolf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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