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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선생 Sep 05. 2022

머리에 남는 독서의 비밀, '초서' 와 '비망록'


독서에 흥미를 붙인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대학 동기가 내가 몇 주 전에 읽은 책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히 책을 읽을 때는 큰 감동을 받고 새로운 인생을 살 것처럼 의기양양했는데, 고작 몇 주 지났다고 누가 지우개로 내 기억을 깨끗이 지운냥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저 책을 읽을 당시의 감정만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순간 현타가 왔다.



이렇게 까먹을 건데 대체 책을 왜 읽고 있는 거지?



그래서 그때부터 어떻게든 기억에 남는 독서를 해보기로 다짐했다. 독서법뿐만이 아니라 암기 혹은 기억력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직접 나의 독서에 적용해보면서, 휘발되는 독서가 아닌 축적되는 독서를 위한 나만의 방법을 만들어나갔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나만의 책 읽기 방식인 핵독을 완성하게 되었다.


https://brunch.co.kr/@kap/68


그런데 핵독을 완성하고 꽤나 시간이 흐른 후에 내가 최초로(?) 만든 줄 알았던 핵독의 핵심이 사실은 오래전에 동양과 서양 모두공통적으로 존재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물론 자세히 보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동양에는 다산 정약용이 강조한 '초서', 서양에는 에라스뮈스가 이야기한 '비망록'이라 불리는 방법이 있었다. 둘 다 모두 독서를 할 때 핵심을 나만의 방식으로 요약정리하는 법에 대한 개념이다.


"초서의 방법은 내 학문이 주장하는 바가 먼저 있은 뒤라야 저울질이 마음에 있게 되어 취하고 버림이 어렵지 않게 된다. (...) 책 한 권을 얻어 내 학문 중에 보충할 것이 있거든 추려서 엮도록 해라. 그렇지 않은 책은 눈길도 주어서는 안 된다. 비록 1백 권의 책이라도 열흘 공부에 지나지 않는다."

- 정민의 <삶을 바꾼 만남> 중 -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인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는 1512년에 쓴 교과서 <풍부함에 대하여(De CoPia)>에서 기억과 읽기 사이의 관계를 강조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적당히 작은 표시를 이용해 눈에 띄는 단어의 등장, 고어체나 새로운 용어, 눈에 띄게 훌륭한 스타일, 격언, 예시 그리고 기억할 가치가 있는 간결하면서 함축적인 언급 등에 표시하는 방식을 통해 각자의 책에 주석을 달 것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모든 학생과 교사들에게 공책 정리를 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 공책을 주제별로 분류함으로써 "기록해놓을 만한 어떤 대상과 마주치더라도 적합한 섹션을 찾아 적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요약문을 직접 받아 적고, 정기적으로 복습하는 것은 이 지식들을 머릿속에 확실히 자리 잡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 모두가 기억할 만한 인용구를 적어야 한다는 에라스뮈스의 조언은 광범위하고도 열정적으로 지켜졌다. '비망록'으로 불리게 된 이 같은 공책들은 르네상스 교육의 특징이 되었으며, 모든 학생들이 이 비망록을 작성했다. 17세기 무렵에는 학교를 넘어 폭넓게 사용되었다. 비망록은 학식을 갖춘 사고를 함양하기 위한 필수 도구로 인식되었다.

-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중 -


독서를 한다는 것은 책의 내용 전부를 암기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리고 설령 하려고 해도 그것은 닿을 수 없는 지점에 있는 목표다. 독서는 단순 유희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 책이 전하고 하는 '핵심 메시지' 혹은 내가 인상적으로 생각하는 '내용' 혹은 '감정'을 나만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 가깝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초서'와 '비망록'과 같은 과정이 필수적일 것이다.


또한 나만의 '초서'와 '비망록'추후에 글을 쓰게 될 때 엄청난 자산이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염두하지 않고 블로그에 정리해왔는데, 올해부터 글을 쓰면서 이것의 막강한 힘을 느끼고 있다. 내가 매일 글을 쓸 수 있는 것의 상당 부분은 나만의 '초서'와 '비망록' 덕분이었다.


머리에 남는 독서를 원한다면 그리고 글쓰기 막강한 지원군을 원한다면 나만의 '초서'를 하고 '비망록'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P.S. 나만의 '초서'와 '비망록'을 만들고자 한다면 책을 읽은 당일보다는 최소 하루가 지나고 정리하는 것을 추천한다. 적당한 시차를 두고 내용을 상기(recall)하는 것이 오래 기억하는데 더 유리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고 나서 최소 1일 후에 정리하는 편이다.


<같이 보면 좋은 글>

https://brunch.co.kr/brunchbook/kap11


Photo by Aaron Burde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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