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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선생 Jan 12. 2023

논쟁할 이유가 없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논쟁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오프라인이건 온라인이건 상관없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공격과 의견에 대해서는 체하지 않고 반론을 펼쳤다. 때로는 인터넷에서 17대 1을 넘어 수백 대 1의 외로운 싸움을 펼치기도 했다(다수가 옳다고 믿는 분이 보기에는 내 잘못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도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이러한 논쟁 중에 의미가 있었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실 기억이 나질 않는 걸 보면 없었다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러한 깨달음이 나로 하여금 '논쟁하지 않는 사람'을 지향하게 만들었다. 지향의 이유는 논리보다는 감정, 머리보다는 몸의 감각에 근거했기에 타인에게 이를 명확하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이런 나의 고충을 깔끔하게 해결해 준 사람을 만났다. 우치다 다쓰루였다.


나는 논쟁이란 걸 하지 않는다.

나 자신에 대한 비판에는 일절 반론하지 않기 때문에 논쟁이 되지 않는다. 왜 반론하지 않는가 하면 나에 대한 비판은 늘 옳든지 그르든지 둘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비판이 옳다면 나는 반론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내가 무지하다든지 태도가 나쁘다든지 비인정하다는 비판은 모두 사실이기 때문에 나에게 반론의 여지가 없다. 질책 앞에서 숙연하게 머리를 숙일뿐이다. 그리고 비판이 틀렸으면 더욱더 반론이 필요 없다.

나처럼 알기 쉬운 이야기를 쓰는 사람의 글에 대한 비판이 틀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지성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이다. 부족한 지성을 상대로 사람의 도리와 옳고 그름을 설명하는 것은 소모적인 일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비판을 받아도 반론하지 않는 것을 기본 방침으로 삼고 있다. 게다가 내가 아는 한 논쟁에서 정말로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은 '문제의 글'과 '그에 대한 비판의 글' 단 두 가지뿐이다. 그 이후에 쓰인 글은 비판을 반대하는 것이든 거듭 비판하는 것이든 모두 질적인 면에서 처음 두 글을 뛰어넘지 못한다(점점 신경질적이 되고 쓰면 쓸수록 질이 떨어질 뿐이다)

최초의 비판이 등장한 단계에서 논쟁의 기초자료는 이미 갖추어졌기 때문에 여기에 군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다. 논의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것은 당사자들이 아니라 독자 여러분이다.

- 우치다 다쓰루의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박동섭 옮김, 유유, 2020) 중 -


그가 말하듯 나에 대한 비판이 옳으면 할 말이 없고, 옳지 않아도 할 말이 없다. 전자는 진짜 할 말이 없어서고, 후자는 해줄 말이 없어서다. 그렇기 때문에 논쟁은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행동은 말처럼 쉽지 않다. 감정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열띠게 논쟁하고 있는 나를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서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는 애처로운 마음으로 살짝 눈감아 주기를 부탁드린다. 사람이 어찌 그렇게 쉽게 변하겠는가?


이 글을 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할 이유가 있다고 말할 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할 말이 없다. 그 이유가 두 가지 중 무엇 때문인지는 여러분의 해석에 맡기겠다.



P.S. 논쟁할 이유가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금융치료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선을 넘는 분들에게는 반론보다는 법이 제공하는 금융치료를 제공해 드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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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Afif Ramdhasum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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