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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 질을 만든다

by 캡선생


내가 브런치에 300일 동안 매일 글쓰기를 하는 것에 대해 안 좋게 보는 시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심이 담긴 글은 그렇게 매일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써내는 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와 같은 생각과 말을 직접적으로 때로는 간접적으로 듣게 되었다.


이런 의견을 접할 때마다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진심에는 총량이 있어서 매일 쓰면 없어지는 건가?', '내 글에 진심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는 거지?', '진심을 말하는 그들은 본인의 진심을 분명히 아는 것인가? 나는 아직도 나에 대해 잘 모르겠는데'와 같은 의문 말이다. 그들의 말이 나를 걱정하는 진심어린 말인지 아니면 르상티망(ressentiment)에서 비롯된 내려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에게는 확고한 믿음이 그리고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양이 질을 만든다'는 믿음, 그리고 이를 위해 '매일 글쓰기를 한다'는 목표였다.


관심 있는 분야, 더 정확히는 잘하고 싶은 분야를 발견하면 초반에 나의 시간을 갈아 넣는 편이다. 무지하고 무능한 초보가 유일하게 보유한 자원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효율과 효과는 나중의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에게는 무엇이 효율적이고 효과적인지 판단할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반에는 시간을 갈아 넣을 수밖에 없다. 이것을 다른 말로 '양'으로 승부를 본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이 어느 정도 쌓이다 보면 '질'에 대한 기준이 생기게 된다. 음악을 다양하게 꾸준히 듣는다고 음악을 바로 잘할 수는 없겠지만, 독특하고 좋은 음악과 뻔하고 그저 그런 음악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생기듯이 말이다. 이러한 기준이 생기면 그때부터 조금 더 나은 '질'을 위해 노력하면 된다.


내가 브런치에서 300일 동안 매일 글쓰기를 한 것은 이와 같이 좋은 글에 대한 기준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 기준을 통해 조금 더 나은 글쓰기, 즉 '질'을 높이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이처럼 양이 늘어나면 질이 높아진다는 것을 '양질전환(量質轉換)'이라고 하는데 귀납적으로도 어느 정도 검증된 사실이다.


피카소는 2만 점이 넘는 작품, 아인슈타인은 240편의 논문, 바흐는 매주 한 편씩 칸타타를 작곡했고, 에디슨은 무려 1,039개의 특허를 신청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수들은 좋은 작품 못지않게 형편없는 작품도 많이 만들었다.

- 한근태의 <일생에 한 번은 고수를 만나라>(미래의창, 2013) 중 -


사회적 이노베이션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사회 전체적으로 도전의 '양'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는 졸저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조직을 만드는 법>에서도 언급한 사항인데, 아이디어의 '질(quality)'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이디어의 '양(quantity)'이다.

사이먼튼은 과학자든 작곡가든, 특정 인물이 이뤄낸 최고의 성과는 그 사람이 가장 아웃풋을 많이 내는 시기에 창출됐다고 명백히 밝혔다. 동시에, 그 과학자나 작곡가의 인생에서 가장 형편없는 논문이나 작품도 그 시기에 나온다고 강조했다. 즉, 실패가 두려워 신중하게 하느라 '시도하는 양'이 줄어들면 결과적으로 '질' 또한 떨어진다. 우리는 성공의 반대쪽에 실패를 대치시켜 놓고 성공을 추구하면서 실패는 가능한 한 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고찰한 바를 살펴보면 이익이 되는 좋은 일만 골라서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야마구치 슈의 <비즈니스의 미래>(김윤경 옮김, 흐름출판, 2022) 중 -


'양질전환'을 추구하면 매우 높은 확률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외면하는 이유는 양을 늘리는 게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먼저 양을 늘린다는 것은 결과에 상관없이 꾸준하게 해 나가는 성실함을 요하는데, 이는 마치 맨땅에 헤딩하기 같은 느낌을 준다. 즉각적인 보상도 사람들의 반응도 주어지지 않는 행동을 꾸준히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의지력을 요한다. 요즘같이 인풋을 넣으면 아웃풋이 즉각적으로 나오는 것이 흔한 시대에는 더더욱 말이다.


결과에 상관없이 꾸준히 할 다짐을 하더라도 끝이 아니다. 쪽팔림을 감수할 용기도 필요하다. 위 두 책의 인용문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양이 늘어나면 필연적으로 질이 낮은 결과 또한 늘어난다. 즉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하는 결과를 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살 수도 있는 결과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감내하고 꾸준히 해나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최선을 다하는데도 불구하고 비웃음을 살 수 있는 상황을 누가 쉽게 감내할 수 있겠는가?


또한 운 좋게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스스로도 꼭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JYP 박진영도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본인의 초창기 작품인 <날 떠나지 마>에 대해 초보적인 곡이라고 말하며 아쉬움을 표했고, 유시민도 본인의 초기 베스트셀러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 대한 아쉬움으로 전면개정하여 책을 다시 출간했으니 말이다. 이처럼 양질전환의 과정에서 자타가 만족하는 작품만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이것을 극복해 내야만 양질전환이 제공하는 최고의 품질을 맛볼 수 있다.


양질전환을 위해 우리는 농사꾼이자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즉각적으로 보상을 얻는 사냥꾼이 아닌 몇 번의 계절이 지나야 큰 수확을 얻는 농사꾼의 심정으로, 그리고 수천번 우스꽝스럽게 넘어져도 쪽팔려하지 않고 두 발로 걷기를 포기하지 않는 어린아이처럼 양질전환을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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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kap/32


사진: UnsplashMarkus Spis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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