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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선생 Mar 29. 2023

쓸모없음의 쓸모있음


퇴사하고 스스로에게 1년 간의 휴식, 멋진 말로 '갭이어(Gap Year)'를 선물했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회사를 그만둔 동기들을 보면 이직을 하거나, 커리어와 관련 있는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사회적으로 '쓸모있다'라고 여겨지는 무언가를 열심히 한 것이다. 그와 달리 나는 '쓸모없다'라고 여겨지는 활동에 집중했다. 이를테면 니체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공부한다든지, 아니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공부한다든지와 같이 말이다.


이런 모습을 본 지인들은 하나같이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공부하느냐고 묻곤 했다. 그들의 뉘앙스는 귀중한 시간을 왜 쓸모없는데 쓰냐는 것이었다. 악의가 아닌 나를 위한 선의의 말이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두 음절이었다. 그냥.


우치다 다쓰루는 "쾌락은 무언가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에 비추어보면 그것은 쾌락이었다. 그냥 그런 것들, 즉 들어봤으 모르는 것을 공부하는 과정 자체가 나에겐 큰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1년가량의 갭이어 기간 대부분을 이렇게 남들이 보았을 때 쓸모없는 것을 하는데 보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이것이 신의 한 수였다. 위기 때마다 도움을 주고,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내 손에 쥐어준 것은 이러한 '쓸모없음'이었다. 마치 닭의 울음소리를 흉내 내고 개처럼 무언가를 훔치는 능력도 언젠가 도움이 된다는 '계명구도(鷄鳴狗盜)'라는 고사성어처럼 말이다.


맹상군은 출신과 신분에 관계없이 자신을 찾아오는 인물이라면 누구라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개 도둑 출신과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식객까지 받아들이자 다른 식객들은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그렇지만 맹상군은 아랑곳하지 않았지요. 그 무렵 강대국인 진(秦) 소왕이 맹상군을 초청했습니다. 말이 초청이지 소환이나 마찬가지였지요. 이에 맹상군은 여러 식객들과 함께 진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에 머문 지 오래되었지만 맹상군 일행은 풀려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 맹상군 일행은 탈출하기 위해 꾀를 냈고, 소왕의 애첩에게 뇌물을 주고 소왕을 설득하고자 했습니다. 그러자 애첩은 여우 가죽으로 만든 귀한 호백구란 옷을 요구했지요. 그러나 맹상군이 진나라에 올 때 가지고 온 그 옷은 이미 소왕에게 선물로 바친 후였습니다. 그러자 개 도둑 출신 식객이 말했습니다. “제가 그 호백구를 훔쳐 오겠습니다.” 그날 밤 그는 소왕의 침전으로 들어 호백구를 훔쳐 왔고, 맹상군은 그 옷을 애첩에게 바친 후 겨우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애첩의 도움을 받아 객사를 나온 맹상군 일행은 한시바삐 진나라를 벗어나기 위해 국경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국경에 도착했을 무렵은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습니다. 당연히 국경 관문은 열리지 않았고, 맹상군 일행은 조바심을 내며 관문이 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뒤에서는 진나라 군사가 쫓아오고 문은 열리지 않는 그때, 식객 하나가 닭 울음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러자 동네 닭들이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모두 울어댔고, 이 소리를 들은 경비병들은 날이 샜다고 여겨 관문을 열었습니다. 결국 맹상군 일행은 진나라를 벗어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계명구도 (고사성어랑 일촌 맺기, 2010. 9. 15., 기획집단 MOIM, 신동민)



1년 간의 갭이어 후에 마케팅/컨설팅 회사를 아는 분과 창업하면서 직접 영업을 뛰어야 했다. 대기업에서는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면 되었는데, 회사밖 세상은 전혀 달랐다. 가만히 있으면 일도 주어지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세상 밖에 나가 회사를 어필해야 했고, 쟁쟁한 회사와 경쟁을 해서 프로젝트를 따내야만 했다.


우리처럼 작은 신생업체가 대형 업체와 경쟁할 때의 무기는 '전략적 차별화'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적 차별화는 쓸모없음으로 여겨졌던 '철학'과 '물리학'이 가져다주었다. 부분의 마케터들은 이러한 분야를 나처럼 열정적으로 공부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결국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바라는 클라이언트의 마음을 우리가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쓸모없음에서 비롯된 생각 덕분이었다.


본업과 별개로 부업으로 진행하는 모임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모임에서 참여자의 호평을 받은 큰 이유 중 하나는 쓸모없음 덕분이었다. "캡선생님이 진행하는 마케팅 모임은 철학적인 부분이 특히 좋아요", "물리학을 철학과 연계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신선하고 좋았습니다"와 같이 쓸모없음은 다른 모임과는 다른 한끗의 독특한 매을 만들어주었다.


잘 생각해 보면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나의 경우처럼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더 크게는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수백억 원 이상의 가치를 갖는 페이커의 게임실력은, 조선시대에는 쓸모없음이 된다. 우리나라 개그맨이 유용하게 선보이는 '사투리 개그'는 미국으로 가는 순간 쓸모없는 개그가 되어버린다. 이처럼 쓸모의 유무는 시공간에 의존하게 된다. 다른 말로 시공간이 변함에 따라 쓸모있음과 없음은 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 우리나라 기준으로 쓸모 있는 것잘하려는 데 노력한다. 쓸모있음에 유효기간이 있는 것을 떠나서, 갱쟁률이 어머어마한 게임에서 조금이라도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타고난 재능과 피땀눈물 어린 노력이 없다면 두각을 나타내기 힘들다.


쓸모없음이라는 게임은 이와 다르다. 소수만이 뛰어들기에 경쟁률이 낮다. 조금만 하더라도 외부인의 눈에는 엄청난 능력처럼 보이는 것이다. 가장 쓸모 있는 외국어로 여겨지는 영어를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대부분이 주목하지 않는 아프리카 소수부족의 언어는 조금만 시간을 들여도 그 언어의 전문가처럼 보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돈을 벌고 살아가려면 '쓸모 있음'으로 여겨지는 기본적인 것은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일부의 시간은 '쓸모없음'에 투자하는 것 좋지 않을까? 설령 그것이 쓸모있음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어떠한가. 우리가 그 과정에서 기쁨을 느낄 수만 있다면 본전은 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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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UnsplashAnne Nygå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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