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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선생 Apr 06. 2023

'준비 시작'이 아닌 '시작 준비'


'영어모임', '독서모임', '관심사모임' 등등. 수많은 모임을 진행하면서 내가 일관적으로 말하는 게 있다. 바로 참여자가 아닌 진행자로서 모임을 경험해 보시라는 것이다. 소비자로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그래서 느낄 수 없던 영역을 생산자가 되면 보고 느낄 수 있다고. 그래서 더 풍성하게 모임을 즐길 수 있다고 말이다.


나의 일관된 말처럼 참여자들의 일관된 답변이 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나중에 준비하고 도전해 볼게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을 해본다. 나는 준비가 되었기에 모임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시작했던 것일까. 답은 단언컨대 '아니다'이다. 그냥 '얼떨결에' 시작을 했다.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채.


대학교를 다닐 때 외부에서 진행하는 영어회화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여를 했었다. 대학생과 직장인이 반반 정도 섞인 모임이었다. 그 당시 나는 참여자 중 어린 축에 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임장이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참석을 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대부분의 참석자가 신입이거나 신입으로 봐도 무방한 사람들이었다. 자연스레 상대적으로 오래 참석한 내가 모임을 이끌어야 하는 분위기였다. 그날 어설프게 모임을 진행한 후로 나는 쭉 모임장으로서 참여를 하게 되었다.


그 후로도 대부분의 모임에서 모임장을 맡은 것은 이처럼 우연한 기회, 혹은 반강제적인 상황 덕분(?)이었다.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준비는 뒤늦게 해 나갔다. 수영장에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으며 수영을 배운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바다에 빠져서 생존을 위해 수영을 배워나간 것이다.


이는 나만의 특수한 경우는 아닐 것이다. 주위에서 모임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이처럼 얼떨결에 시작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시작하기 전에 준비를 한다는 것은 조금 이상한 말이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것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외부자의 시선에서 볼 때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 직접 그 일을 하는 내부자가 되었을 때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이처럼 직접 해보기 전까지는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하는지조차 알기 힘들다.


물론 경험자의 말이나 글을 통해서 어렴풋하게나마 일에 대한 간접적인 이해와 그에 따른 준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대부분의 경우 매우 미미하다는 것이 문제다. 오랜 기간 준비를 하더라도 직접 해보면 새롭게 배우고 익혀야 할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준비-시작'보다는 '시작-준비'를 하는 것이 여러모로 낫않나 싶다.


야스토미 아유미의 <누가 어린왕자를 죽였는가>에 따르면 사고방식은 크게 '엔지니어링(Engineering)'과 '브리콜라주(Bricolage)'로 나눌 수 있다. 엔지니어링은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고려하여 부족한 것은 보충하거나 새롭게 만드려고 하는 방식이다. 이와 반대로 브리콜라주는 수중에 있는 것을 어떻게든 활용하여 일을 해나가는 것이다. 네 발로 걷던 인류 조상들의 두 앞다리로 글도 쓰고, 핸드폰도 조작하고, 피아노도 연주하는 것처럼 인간은 '브리콜라주'로 살아왔다. 기존에 갖고 있던 것들로 일단 시작하고 어떻게든 준비해 나가는 것이다.


또한 모든 것을 시작 전 미리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문제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미리 알게 되면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모임장뿐만 아니라 사업을 하면서 느낀 것은 이 모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이었다. 세상만사 즐거움의 크기만큼 어려움의 크기도 클 수밖에 없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말이다. 그런데 준비를 하는 입장에서는 빛보다 어둠의 크기가 더 크게 느껴지기에 지레 겁먹기 십상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지 않는가. 새로운 일을 할 때는 적당히 무식할 필요가 있다.


오늘의 글은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최근에 새로운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라는 생각을 먼저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금 시작을 하고 준비를 했던 경험들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그를 통해 성장한 나를 돌이켜 본다.



P.S. 생명을 다루는 일과 같이 특정 분야는 '시작-준비'를 적용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니 각자의 상황과 기질에 따라 가려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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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brunchbook/kaptop4


사진: Unsplashthe blow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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