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나야, 언니는 죽지 않아.’
우미가 내뱉은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해나가 문을 박차고 나간 뒤 찾아온 정적 속에서, 나는 냉장고 문을 열며 뒤늦게 밀려오는 감정에 기댔다. 집 안은 어수선했지만, 우미는 '오늘의 일과'에 맞춰 계절 옷정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기계적인 움직임이 부엌과거실을 오가며 규칙적인 소음을 만들어냈다.
문득, 퇴근 직전 대표실에서 봤던 그녀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되감아보았다. 내 동생 해나의 이름과 신상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사람. 사회통념상 생각되는 '대표'의 딱딱하고 근엄한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우리 회사의 ‘독특한 대표’ 말이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듯 보이는 그곳, 하트랩 대표실에도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방 안은 벽마다 온갖 종류의 하트 모양 포스터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도무지 이름을 들어도 알 수 없는 최신 아이돌의 음악이 항상 흘러나왔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정기 배송된 싱싱한 꽃으로 화병을 갈아치우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지나치게 밝고 산만한 분위기에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그런 소란스러움 속에서 가장 의외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대표의 책상 위에 놓인 검고 묵직한 명패였다. 존재 자체만으로 무게감을 더하는 명패에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소유하.
스무 살의 나이로 작은 휴머노이드 제조 회사인 '하트랩'을 이끌고 있는 그녀는, 사실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로봇 제조 기업인 소유그룹의 외손녀였다. 휴머노이드가 일상화된 세상에서, 소유그룹은 단순한 제조업체를 넘어 사회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거대 기업이었다. 소유그룹의 회장인 할머니는 자신의 하나뿐인 외손녀를 애지중지 키웠다. 너무나 끔찍이 아낀 나머지 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간 손녀를 살리기 위해 그녀의 몸 절반을 기계로 만들어버렸지만. 그렇게 살린 소유하는 집안 내에서도, 그룹 내에서도 파격적인 존재였다.
그녀가 열일곱 살 때 명절에 모인 집안어른들에게 한말은 사회면에서 다룰정도로 유명했다.
“기계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인간의 감정이야말로, 독점 가능한 최고의 아이템이지 않겠어요?”
어린 손녀의 패기에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충동적으로 하지만 어쩌면 미래를 내다본 듯, 곁다리로 운영하던 작은 상조회사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세상 사람들은 소유그룹 회장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대해 그룹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실험적인 시도라고 추측했지만, 진실은 알 수 없었다.
소유하 대표의 예측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다. 그녀의 작은 회사는 3년 만에 휴머노이드 제조 업계에 단단히 뿌리내렸다. 사람들은 입소문을 통해 이 회사를 알게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성공의 절반은 불법적인 사업 운영 덕분이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이 회사에 발을 들인 것도 어딘가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다.
허공을 훅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나는 넘어졌다. 충격과 동시에 식당 바닥이 싸늘하게 등을 파고들었다. 처음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고개를 드니 마주한건 주방 이모의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붉은 액체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녀의 피라고 생각했다. 손님들의 비명이 식당 전체로 퍼졌지만 내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피 흘리는 그녀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곧 왼쪽 배에 스며드는 싸늘한 감촉과 함께 눈앞이 하얘졌다. 고개를 내려보자, 녹색 앞치마 위로 선명한 붉은 물감이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이 피가 내 피였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의식이 끊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보호자 자리에 엄마나 동생 대신 소유하 대표가 앉아 있었다. 병실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도 그녀는 어딘가 즐거운 듯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자세와는 어울리지 않게, 어깨에서 막 벗어놓은 듯한 백팩이 의자 옆 바닥에 놓여 있었다. 백팩 지퍼 틈이나 주머니 밖으로는 무슨 동아리 신입 모집 전단지나 설명회 안내문, 혹은 전공 서적 표지 같은 것이 슬쩍 보였다. 그녀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다친 건 유감이지만, 당신 덕분에 귀중한 데이터를 얻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부드러웠고, 어딘가 섬뜩했다. 그래서 나는 누구냐고 묻는 것도 잊은 채 마른침만 삼킬 뿐이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침묵 속에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천천히 훑었다.
"저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날 다치게 만든 주방 이모가 하트랩에서 시범용으로 출시한 휴머노이드였다는 사실을 소유하는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나아가 자신 또한 절반은 기계임을 아무렇지 않게, 마치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드러냈다. (일반적인 하프휴먼이라면, 성형 사실을 숨기듯 굳이 남 앞에 말하지 않는 사실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바로 그날, 마치 모든 게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라는 듯이 그녀는 내 앞에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모든 치료와 비용을 지원해주겠다는 말과 함께.
내가 일하던 김밥집에 실험용 모델이 배치됐다는 건 정말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을까. 머릿속은 점점 혼란스러웠다.
하필 동생 해나와도 크게 싸운 탓에 마음은 더 복잡하고 불편했다. 깊게 숨을 들이쉬며 두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자, 옆에서 우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커피라도 타 줄까?"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쩌다 보니 요즘 내 주변은 점점 인간이 아닌 존재들로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