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걸리 담가먹는 이야기(5) -
[2025년 여름]
이제 막 시작한 터라, 결과는 좀 기다려야 한다. 초보의 운을 살짝 기대하곤 있으나, 어떻게 마무리될지 아직 모르겠다. 술 담는데 필요한 누룩 빚는 이야기다. 이것으로 난 이번 여름을 통째로 익힐 생각이다.
목요일 퇴근길이다. 무더위는 계속되고 있다. 저녁마다 체중 감량을 위한 러닝도 멈추지 않았다. 피로가 쌓이고 있다. 오늘 저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좀 쉬어야겠다는 마음이 가득하다. 그래, 오늘은 좀 쉬자.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퇴근길 막히는 길과, 아직 힘을 잃지 않은 늦은 오후의 햇살도 버틸 만했다. 집에 돌아와 텃밭에 물을 주고 가볍게 저녁을 먹었다. 이제 애써 할 일은 없다. 의자에 앉아 시원한 보리차 한 잔을 천천히 마셨다. 한껏 여유로운 체를 해본다. 휴대폰도 잠시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이런 여유로움은 가끔 강렬한 충동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거실 한구석에 놓인 종이 박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배송된 밀가루 박스다. 일반 밀가루가 아니라, 누룩 빚기용으로 거칠게 분쇄된 전용 통밀가루다. 주말이 되면 빚어야지 했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일었다. 그래, 노느니 지금 빚어 보자. 생활 대부분이 게으르면서도 이럴 땐 부지런하다.
지난겨울, 술을 몇 번 담고 나니 누룩도 한번 빚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누룩은 여름에 빚는 거라 배웠기에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 여름이 어느덧 한여름까지 되었다. 여름에 들어서도 과연 누룩까지 빚어야 하는 걸까 망설였다. 술담기와 달리 누룩 빚기 관련 정보는 많이 부족하다. 그나마 있는 정보도 제각각이다. 장님 코끼리 더듬는 식으로 만들어야 한다. 솔직히 성공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냥 기성품을 사용하고 말지 하는 생각도 강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취미 아닌가? 직접 만든 누룩으로 술을 담는다는 건, 취미 양조인에겐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실패하면 아쉽겠지만, 그 과정의 재미는 고스란히 남을 것이고, 내년 여름에 또 만들면 그만이다. 꽤 오랫동안의 인터넷 검색 끝에 누룩 제조용 밀가루를 겨우 주문했다.
누룩의 기본인, 밀로 빚는 누룩이다. 밀가루 2킬로그램을 대야에 넣고 잘 섞어 줬다. 500ml의 물을 분무기에 넣고 뿌린다. 조금 뿌리고 섞어 주고, 조금 뿌리고 섞어 주기를 반복한다. 거친 가루들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며 서로 뭉쳐 갔다. 여름의 온기를 머금은 가루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시간과 공을 들여 섞어 나간다. 저들도 나름 화학 반응을 거쳐 변해갈 것이다. 억세게 다루고 싶지 않다. 도와줄 일이지 강요할 일은 아니다.
물을 한꺼번에 넣게 되면 반죽의 특정 부분만 수분이 많아질 우려가 있다. 굳이 분무기를 사용한 이유다. 물을 넣는 속도가 느리니 반죽 만들어지는 시간도 오래 걸렸다. 게다가 생각보다 많은 물이 필요했다. 유통 과정의 부패 방지를 위해, 밀가루는 완진히 건조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900ml 정도 물을 뿌리고 나서야 반죽이 완성됐다.
반죽을 손으로 꼭 쥐어 본다. 형태는 유지하면서도, 손에 묻는 것이 없어야 한다.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이게 맞나 싶지만, 기준은 충족한 듯했다. 누룩 담을 면포를 물에 적셔 꼭 짰다. 물기가 너무 많으면 반죽이 천에 붙고, 너무 없으면 반죽의 수분을 뺏는다.
누룩틀 대신 1인용 프라이팬을 꺼내 면포를 깔았다. 반죽을 소분해 팬에 눌러 담는다. 딱 1킬로그램의 누룩이 담겼다. 면포로 잘 감싸고, 천의 끝을 한데 모으고 둥글게 말아 반죽의 중앙에 놓는다. 마른 수건 한 장을 그 위에 덮는다. 이제 발로 사정없이 꾹꾹 밟아 준다.
반죽의 크기가 줄어들고, 두께가 팬보다 낮아졌다. 얼마나 밟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몸무게를 다 실어 밟았으니 이젠 됐을 것이다. 조심스레 면포를 풀었다. 우선 면포에 묻어 나오는 찌꺼기가 없다. 다 벗기고 나서도 형태가 그대로 유지된다. 너무 크고 두꺼운가 싶지만 무게감은 적당하다. 겉모양도 그럴싸하다. 압축된 반죽의 표면이 맨질하다. 곡물가루 특유의 부드러운 황토색이 말갛게 떠올랐다. 밀가루 반죽이 이렇게 예쁠 일인가 싶다. 이미 누룩 빚기에 성공한 듯 만족감이 차오른다. 역시 해보길 잘했다. 한 개를 더 만들어, 두 개의 덩어리가 생겼다.
이제부터 발효 과정이다. 큰 종이 박스를 준비했다. 역시 큰 비닐 봉투도 준비해 박스 안에 넣는다. 진즉에 사 놓은 볏짚을 봉투 안에 넉넉히 깔았다. 반죽 두 덩이를 연이어 넣었다. 그 위에 또 지푸라기를 넉넉히 덮었다. 비닐 봉투를 여미고 박스를 닫는다. 해가 들지 않고, 더운 상온의 장소에 박스를 둔다. 봉투 속 습도를 유지시킨 상태에서 7일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다시 봉투를 벗기고 지푸라기로 감싼 채 7일, 최종적으로는 반죽 자체로만 그늘에서 7일을 말려야 한다.
2일 차
비닐에 물방울이 많이 맺혀 있다. 봉투 안으로 손을 넣어보니 후끈한 기운이 느껴진다. 지푸라기를 헤치고 반죽을 관찰했다. 아직 곰팡이는 육안으로 관찰되지 않았다. 반죽을 뒤집어 준다.
3일 차
박스 안 상태는 그대로다. 다만, 반죽을 뒤집어 보니 곰팡이가 보였다. 하얀색보다는 회색에 가까운 곰팡이다. 반죽 가운데로 몰려 피었다. 회색 말고 다른 색은 보이지 않는다. 반죽을 뒤집어 준다.
4일 차
회백색 곰팡이가 조금 더 퍼져 있다. 아직 전체를 뒤덮지는 못했다. 냄새는 고소하고 따뜻하다. 껍질째 말린 곡물에서 나는, 익숙하면서도 먼 기억을 건드리는 향이다. 볏짚 더미에서 뒹굴다 나른한 풀 냄새를 가득 묻혀 달려오던, 시골 외갓집 강아지 통통한 배에서 나던 냄새가 떠올랐다. 술을 빚다 보면, 이렇게 오래도록 잊고 있던 내 지난 풍경들이 문득 찾아온다. 반죽을 조심스레 뒤집어 줬다.
** 누룩 빚는 이야기는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