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걸리 담가먹는 이야기(1) -
[2024년 겨울] 오늘, 누룩을 주문했다. 그리 대단한 동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오래된 기억 하나가 문득 떠올랐을 뿐이다.
어릴 적, 명절 무렵이 되면 어머니는 술을 빚으셨다. 외갓집에서 전해 내려온 가양주였을 것이다. 그때의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마셔본 적이 있었는지도, 이제는 확신할 수 없다. (아마도 몰래 한 모금 정도는 입에 대봤을 것이다. 어린 나는 그런 짓을 못할 아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안방 술동이에서 퍼지는 그 향기만큼은, 지금도 선명하다. 달큰하면서도 맑고, 과일향 같긴 한데 정확히 어떤 과일인지는 떠오르지 않는, 아득하고 노곤한 향기였다. 숨을 들이켜는 순간, 약간의 아찔함과 함께 가슴속에는 서늘한 기운이 퍼지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난 그 순간이 무척 평온했다고 기억한다. 그 향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아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년 전쯤엔가 한 번, 술 빚는 흉내를 내 본 적이 있다. 누룩을 사고, 고두밥을 지어, 항아리에 담고 발효까지 진행했다. 처음 몇 날은 괜찮았다. 그 향기가 언뜻 스쳤고, 이에 맞춰 마음속 기대감도 차올랐다. 하지만 막바지 어디쯤에서 뭔가 어긋나 버리고 말았다. 항아리 안에 담긴 액체는 술도 아니었고, 식초도 아니었다. 도무지 이름 붙일 수 없는 맛이 났다. 근거 없는 '숙성'이라는 희망에, 냉장고에 며칠 묵혀봤으나 상태는 더 악화될 뿐이었다. 나는 결국, 그것을 모두 버렸다.
그날 이후, 냉장고 신선칸 구석에 쓰다 남은 누룩이 아직 남아 있었다. 다시 빚어볼 요량이었다. 그게 오늘까지였고, 그간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누룩은 이제 쓸 수 없는 상태일 것이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누룩을 다시 써도 괜찮을 터였다. 건조하고 서늘한 환경이라면 꽤 오래 두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한다.) 묵은 누룩을 버리고, 오늘 누룩을 주문했다.
술을 다시 빚고 싶은 이유는, 단지 옛 향수를 다시 느껴보고 싶어서만은 아니다. 좋지 않은 건강으로 인해 내 몸을 어떻게든 돌보며 살아야 하기에, 몸에 좋다는 것에 귀가 열려버린다. 마침 막걸리가 건강식이란 소리가 들렸다. 술을 마시며 건강을 논한다는 것이 우스웠다. 하지만, 발효균이 살아있는 생막걸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했다. 요거트와 비교할 수 없는 대량의 유산균, 비타민 B군, 각종 효소와 식이섬유에 대한 이야기는 날 설득하기에 충분한 논리였다. 지금 내 몸이 보내고 있는 신호가 너무 분명하고도 급했다.
한 때 요거트를 직접 만들어 먹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식사와 별도로 챙겨야 하는 방식이 내 생활의 결과 맞지 않았다. 금세 시들해져서 결국 버려지는 유리병들만 남았다. 막걸리는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녁 식사 후 딱 한 잔, 그 한 잔으로 충분할 것 같다. 다만, 한 잔으로 그치지 않는다면 내 허리둘레는 당장 반응할 것도 알기에 통제는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최근 두어 주, 마트에서 생막걸리를 사다 마셔봤다. 효과가 있는 것인지, 헛배 부르는 증상도, 변비도 사라졌다. 그 외에는 아직 잘 모르겠다. 확실히 느끼는 것이 있다. 한 잔이면 약이고, 두 잔이면 독이다.
그러다 보니 직접 술을 빚고 싶은 마음이 다시 생겼다. 시중에 파는 '공산품' 막걸리가 맛도 있고, 편리하고 싸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겼을 각종 첨가물은 맘에 들지 않는다. 그 맛에 길들여지는 것이 싫다. 마시고 난 뒤 생기는 빈 플라스틱병도 처치 곤란이다. 그러다 보니 직접 막걸리를 빚고자 하는 욕구가 다시 생겼다. 농약 친 농산물이 싫어, 텃밭을 꾸미는 사람들처럼, 나도 내가 만든 술의 그 향과 맛을 느끼고 싶어졌다.
내 손을 다시 믿어보기로 한다. 너무 일찍 돌아가셨기에, 술 빚는 법을 배우진 못했지만, 나도 어머니 손을 반쯤은 물려받았을 것이다. 분명 회를 거듭할수록 더 맛있게 빚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술은 추운 날씨에 더 잘 익어간다 했다. 온갖 것이 움츠러들고 속으로만 파고드는 겨울을 잘 나게 해 줄 것도 같다. 그래서 나는 다시 술빚기에 도전한다.
내일쯤 누룩이 도착할 것이다. 고두밥을 짓고, 누룩과 물을 섞어 빈병에 담는다. 쌀 : 물 : 누룩의 비율은 1 : 2 : 0.25로 할 것이다. 처음 사흘은 아침 저녁으로 하루 두 번 저어줄 것이고, 그 뒤로는 밀봉하고 병 속 생명들이 알아서 하게 놔 둘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을 기다릴 것이다. 관건은 온도에 달려 있다고도 한다. 섭씨 20도에서 25도, 우리 집 겨울 실내온도는 그보다 낮아지기 쉽다. 무언가 궁리가 필요하다. 내 기억과 건강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 궁리 쯤은 어쩌면 이 겨울의 가장 즐겁고 유쾌한 이벤트가 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