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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한 책생활 Mar 06. 2021

그릇의 세계 그리고 삶

그릇의 모양새만큼이나 삶의 형태는 다양하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이모의 그릇장을 보면 이모가 보이는 것 같다. 주방 선반을 제외하고도 꽉 찬 그릇장만 세 개. 언뜻 보아도 결혼 25년 차 전업주부의 정돈된 살림살이와 안목, 어디 하나 이모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어 아는 건 레녹스 정도인 살림 욕심 없는 나조차 괜히 그릇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백인 일색인 미국 시골에서 검은 머리 아이를 키우며 적응하려 사람들을 초대해 대접하고, 한국 음식은커녕 외식조차 어려운 곳에서 매일 새로운 메뉴로 정갈한 음식을 만들던 그 세월과 노력이 그릇에 담겼다. 이모가 본인을 미국 거지라 부르던, 이모부가 공부하던 시절에는 마샬이나 티제이맥스 아울렛에서 짝 맞는 그릇을 찾아오는 것도 일상이었다. 그저 지켜보았을 뿐인 나는 잘 모르지만 그릇 같은 것이야 사면 그만인 물건 그 이상의 무엇이 담겼을 것이다.




인생사란 본래 공평하지 않고 사실 공평할 이유도 없는 것이지만, 개인의 삶을 보면 어느 정도 인과 관계는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누군가의 삶이 근사해 보인다면 아마 그곳에 이르기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험난하고 지난한 과정이 있었을 것이고, 그 또한 정성된 오늘이 없다면 지속되기 어렵다.

새 학기라 바빠져 집에 오면 기절하는 일상. 어린이집 연장반에 남아있는 남매를 하원 시키다 보면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모든 곳을 지키면 모든 곳이 약해지는 법이라는데 이러다 이도 저도 안 되는 건 아닐까. 이도 저도 딱히 쉬운 일도 없어 보이고 일을 그만둔다고 해서 살림을 이렇게 할 자신도 없다.

미국에 머물던 언젠가 진로를 고민하던 나에게 이모가 빌립보서 4장 6절 말씀을 보여준 적이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나는 사실 딱히 크리스천이라 말하기 어려운데도 그 날은 어쩐지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는 구절이 무척 힘이 되었다. 몇 년 간 한집에서 지냈어도 오글거리는 말 같은 건 하지 않는 무뚝뚝한 성격에 징징거리는 일이 거의 없는 이모인데. 그녀에게도 절대자의 존재가 필요했던 시기가 있었겠지 생각하니 되려 위안이 되었던 것도 같다.




올해 카투사를 제대한 사촌동생은 다음 학기 시작 전까지 게임 회사에서 앱 개발에 참여 중이다. 열 살 때 한국에 돌아와 공립학교를 다니다 민사고를 졸업하고 스탠퍼드에 입학한 수재. 예의도 바르고 차분한 아이라 이모 육아서 한 권 써야 하는 것 아니냐며 농담을 했는데 본인 주변엔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특별하지 않은 것 같다고. 좋은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도, 귀감이 되는 사람들을 가까이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도 누군가에겐 당연한 일상이 나는 궁금한데 말이지. 물어보면 언제나 엄마는 아이보다 반박자 늦게, 아이를 잘 관찰하다 아이가 관심 보이는 것을 확장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엄마가 이끌어가는 격이 되어서는 안 되며 어려서는 전집도 괜찮지만 초등 이상부터는 전집보단 단행본 위주로. 좋은 책이야 워낙 많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에 잘한다고 인정받는 경험이 자존감으로 이어진다. 많이 칭찬해줄 것. 무엇보다 중요한 엄마의 역할은 아이의 시야를 넓혀주고 꿈을 갖도록 동기부여를 해주는 것이라고.

환경도 예외가 아니다. 아이 열 살까지 미국에 있는 동안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았고, 저녁이면 함께 책 읽다 아홉 시면 잠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생활이 단조로우니 아이는 자연스럽게 본인이 하는 놀이에 집중할 수 있었던 덕분도 있는 것 같다.

여기까진 늘 들었던 이야기다. 몇 번을 들어도 재미있기는 하지만.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한국 동화책도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 한국 여성지 별책부록으로 달려있던 토끼와 거북이 동화책을 이모가 마르고 닳도록 읽어줘 사촌 동생이 한글을 세 살에 뗐다는 것. (설마 미국 나이일 거라 위안해본다.)


일하는 엄마를 둔 해맑은 네 살 다섯 살 남매 일상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되지만 역시 비교는 의미가 없다. 그릇의 모양새만큼이나 다양한 것이 삶의 형태인 것을. 그저 지금 내가 엄마로 쓰일 수 있음에 감사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해볼 뿐. 나도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보기로 한다.



이모의 그릇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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