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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한 책생활 Jun 10. 2021

오늘도 위로의 말을 수집합니다.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


어김없이 돌아온 남편 없는 주말, 날이 너무 좋아 집에만 있기 아쉬워 아이 둘을 데리고 호기롭게 길을 나섰다. 집 앞 샌드위치 가게에 들러 간식과 마실 것을 좀 샀다. 미술관에 가고 싶었지만 아이가 어려 힘들 게 뻔했고, 대신 야외조각공원이 있는 현대미술관에 가려고 마음먹었다. 모처럼 날이 좋아서인지 이미 입구에는 들어가려는 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지루해진 뒷 좌석 아이들은 언제 내리냐며 징징댔고 나는 역시 무리였나 후회하며 진땀을 흘리다, 30분쯤 지나 견디지 못한 앞 차 몇 대가 빠지고야 겨우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노래하는 사람 /조나단 브로프스키


본격 더위가 시작되기 전 청명한 초여름의 초록이 싱그러웠다. 미술관 초입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노래하는 사람’ 조각상이 있다. 어릴 적 이 곳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하루 다섯 번 노래한다고 해서 그 노래를 들으려고 시간을 맞추어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인 커다란 조각상이 반가웠고, 뛰어다니는 남매 옆에 앉아 반짝이는 호수면을 보고 있자니, 요동치던 마음도 잔잔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호수 안에서 호젓하게 헤엄치는 팔뚝만 한 잉어를 발견한 다섯 살 된 아들이 난데없이 물고기를 잡자는 것이었다. 이건 여기서 키우는 거라 못 잡는 거야, 하고 있는데 마침 옆에 자리를 잡은 가족이 치어를 채집통에 잡은 것이 보였다. 우리 집과 비슷한 또래의 형제를 보니 상황이 짐작되었다.


“그거 어떻게 잡으신 거예요?”

“아, 원래는 안되는데 잉어 밥 주면서 유인해서 음료수 통으로 떠 잡았어요.”


다시 놓아줄 거라며 멋쩍어하는 아저씨에게 잉어 밥 정보를 얻고 마침 모래 놀이할 때 썼던 바스켓이 트렁크에 있던 게 생각나 얼른 챙겼다. 센스 있는 엄마가 된 것 같아 스스로 대견해하며.


오후가 되자 햇볕은 점점 뜨거워졌다. 후줄근하면 마음도  초라해질까 봐 하늘하늘 여름 원피스를 꺼내 입었던 나는 호숫가에 쭈그리고 앉아 난간 사이에 손을 넣어 잉어 밥을 뿌리며 치어를 유인했다. 보기보다 날쌘 물고기들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땀방울과 함께 오기가 솟아올랐지만 잉어 밥은 아이가 이미 다 써버린 상태였다.


  없다, 나중에 아빠랑 같이 오자. 아이스크림을 사서 겨우 아이를 달래고 앉아있는데 카톡. 날이 좋아 새벽부터 낚시를  남편이 다금바리를 잡았다며 인증샷을 보냈다. 그때의 기분이란.



요 며칠, 뭔가 해야만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나는 아이들 영어를 가르치는 월급쟁이 강사다. 방학을 대비해야 하면서 일이 많아졌다. 일이 많다고 더 버는 것도 아니다. 국공립 어린이집에 다니는 연년생 남매는 날이 갈수록 에너지가 넘친다. 그저 건강하게 자라주어 고맙고, 부모로서 해주고 싶은 것도 많지만 정작 퇴근하고 오면 밥 해먹이기 바쁘고, 집안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고,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으로 정신없이 저녁을 보내고 나면 다시 아침. 쳇바퀴 돌듯 돌고 돌아 제자리다. 언제까지 이래서는 안 된다.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시간을 아끼고 생산성을 높여서 뭔가 ‘해내야 한다.’


욕망과 불안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이다.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수록 효율은 떨어지고 쓸데없는 자아 성찰과 불안감, 과거에 대한 후회로 분주해져 도리어 일에 구멍을 내고 만다. 모두가 달리는데 나만 제자리걸음을 하는 기분. 점점 조바심이 났다.


출근길 동기 부여를 해보려고 자기 계발서의 대가 브라이언 트레이시의 강연을 들었다. 워라밸을 외치거나 쉬엄쉬엄 행복하게 살자는 태도는 ‘루저’의 방식이라는 말을 듣고 순식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루저인가. 삶을 위로하는 문장들을 수집하는 스스로가 보잘것 없이 느껴졌다. 정신과 전문의 양재진, 양재웅 형제가 쓴 책 <내 마음을 나도 모를 때>를 보면 사주나 운세에 너무 의존해 고민이라는 내담자에게 말한다.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올라가면 해결될 일이라고. 백번 맞는 말이다. 나도 위로를 찾을 게 아니라 상황을 바꾸기 위해 유튜브든 전자책이든 스마트 스토어든, 무언가 만들어내어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한국의 위로 시장은 실로 그 규모가 엄청나다. 사주, 타로, 별자리부터 서점가에 쏟아지는 자존감, 심리서, 수많은 정신상담센터까지. ‘너만 열심히 하면 뭐든지 이룰 수 있다는’ ‘단군 이래 제일 돈 벌기 쉬운’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잘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압박,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 사업 실패, 경제적, 건강상의 어려움, 스스로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수만 가지 다양한 이유로 사람들은 위로를 필요로 한다.


요시타케 신스케의 그림책 속 장면처럼 “겉으로 보면 알 수 없지만, 모두 자기가 느끼는 곤란함”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요시타케 신스케 <오줌이 찔끔>




지난봄 네 번째 생일이 지난 첫째 아이는 그리기와 만들기를 좋아한다. 집에 그런 사람이 없는데 누굴 닮았지 하다, 가만 생각해보니 나도 미술을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전공과 무관하지만 학부 때 미술사 수업을 찾아 듣기도 했고 오래전이지만 유럽과 미국 여행 때 미술관은 반드시 들렀던 편이었다. 무엇보다, 그림을 보고 있는 정지된 순간의 평온함이 좋았다. 지난 주말에도 미술관에 가겠다는 나를 두고 남편이 미술관 자주 가네, 하기에 아 내가 그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낚시를 가는 남편도 물에서 위로받는 것일까.


아이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 힐링이라는 말조차 피곤하다면서 힐링 에세이 앞에서 떠나지 못했다. 말랑한 위로는 그만. 브라이언 트레이시가 말하는 루저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평소처럼 아이를 재우고 난 어느 새벽, 빌려온 책을 펼쳤는데 눈물이 났다.



그림은 이것저것 해두라고 등 떠미는 대신 ‘자네 여기 와서 쉬게나,’ 하고 권합니다.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고 결심하게 하는 대신 ‘너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있지’ 하고 일깨워줍니다.

                                       이주은 <당신도 그림처럼>


그렇구나. 지금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림에서 위로받았던 거구나. 미술관의 공기는 어쩐지 다르다고 느꼈던 것도 그래서였구나. 문득,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창작자는 찍고 싶은 어떤 장면을 소유하는 시점이 올 때까지 불안과 공포에 시달린다, 그 장면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기생충>으로 유명한 봉준호 감독이 한 강연에서 한 말이다. 그 집착이 영화를 찍게 하는 동력이라고.


우리는 어쩌면 각자 생각하는 인생의 장면을 소유할 때까지 불안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때로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책을 읽고, 그림을 보고, 여행을 떠나는지도. 삶이 여유로워서가 아니라 여유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야 원하는 장면까지 무사히 갈 수 있으니까.


밤늦게까지 종이접기를 한다고 사부작대던 다섯 살 아들이 또 새벽같이 일어나 제트기를 만들겠다고 했다. 수면 부족인지 짜증을 내기에,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이니 징징댈 거면 하지 말라고 하려다 꾹 참았다. 이미 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아이에게, 더 노력하라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잘하면 해결될 일이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만히 아이를 안아주었다.


즐거운 만큼만 하는 거야. 지금도 잘하고 있지만, 꼭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이는 결국 제트기 두 개를 완성해냈다.



오늘도 삶을 위로하는 문장들을 수집합니다. 부끄럽지만 저에게 하는 말이 누군가의 오늘을 위로한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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