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으로 살아도 괜찮아
Judgement, 심판이라고 불리는 이 카드는 이름이 주는 위압감 때문에 무언가 죄를 따져보게 되는, 재판의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여러 갈등과 변곡점을 겪고 넘어와 천사의 눈앞에 서서, 그 삶이 과연 올바른 삶이었는가를 '심판'받는 느낌으로 으레 받아들여지게 된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일곱 지옥을 넘어 마지막 육도윤회의 문 앞에서 기다리는 그런 기분이 들게 만든다.
그러나 사실, 심판의 카드가 향하는 그 끝은 사람을 평가하는 그런 자리가 아니다. 심판의 천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앞에, 삶으로부터 많은 부름을 받고 그 시간을 건너온 우리에게 '때가 되었다'라고 선언하며 보다 앞으로 나아갈 것을 종용하는 용기를 선포하는 자리다. 수많은 과거의 과오를 건너, 내면의 나를 다시 깨닫고 받아들일 준비가 된 나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전의 출정식. 심판은, 과거의 나를 끊어내는 통렬한 선언의 시간이다.
사람에게는 수많은 이름이 주어진다. 태어날 때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 세 글자에서부터 시작해서, 누군가의 친구가 되거나, 누군가의 연인이 되거나, 존경하는 선생님이 총애하는 제자라거나, 어느 팀을 이끄는 팀장이라거나. 이름 석 자에서 출발한 자신은, 수많은 갈래길의 자신으로 뻗어나가 점점 수많은 나를 탄생시킨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주어진 이름보다, 상황에 맞는 이름이 주어지고 그 이름이 더 많이 불리게 된다.
자신이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 회사의 결재서류에 서명해야 하거나 하는 일이 아니고서야,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순간에 나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나를 완성시켰다. 부모님이 주신 이름 석 자 외에, 누군가의 아빠로서, 누군가의 남편으로서, 팀장님으로서, 수천수만 가지의 상황에 걸맞게 만들어진 나로서 살아갔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한 페르소나로서의 삶, 나의 삶은 하나의 잘 짜인 각본이었다. 어느 날은 괜찮은 사람으로, 어느 날은 참 배려심 있는 사람으로, 어느 날은 성격이 괴팍하고 냉정한 사람으로.
그러는 동안, 나는 자신을 점점 잃어가고 있던 모양이다. 삶이란 생각보다 견고한 척 위태롭다고 느껴진 것이, 그런 시간들의 끝에 마침내 나는 무너져 내렸다. 정확히는, 내가 생각한 나라는 구조물이 부서졌다.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 누군가의 기대,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어떤 이상. 그 기대를 충실하게 이행했고,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괜찮은 삶을 살고 있던 나 자신의 안에 사실은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 그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거기, 심판의 카드처럼, 하얀빛 속에서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처럼, 나도 내 삶을 처음부터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이전의 나는 내 감정을 조용히 죽이는 데 익숙했다. 말보다는 표정으로, 설명보다는 미소로, 상처는 혼자 꿰매고, 눈물은 돌아서서 삼켰다. 왜냐면 그래야 어른인 줄 알았으니까. 그래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줄 알았고, 그래야 나를 좋아해 줄 거라 믿었으니까. 나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불편해하니, 그들이 바라보기에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그리고 조금 더 편했으니까.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은 삶이 무너지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된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나는 점점 ‘나’라는 사람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걸. 좋은 사람은 되어 있었지만, 그 속에 진짜 나는 없었다.
심판의 부름은 그렇게, 나를 다시 나로 돌아오게 만든다. 그리고 그건 기적 같은 말로 시작되지 않는다. 그저 아주 단순한 자각으로 시작된다.
‘지금 나는, 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여전히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지금도 충분하다고. 더 바랄 게 어디 있냐고. 행복할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니까 보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고.
하지만 나는 안다. ‘충분한 삶’과 ‘내 삶’은 다르다는 걸. 남들이 보기에 모든 것을 가진 나는, 필요한 것은 모두 갖고 있지만 원하는 것은 조금도 가질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고, 심판은 그 차이를 보여준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감정들, 말로 설명되지 않았던 불안, 이제는 외면할 수 없는 그 질문들이 다시 내 앞에 놓인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나는 누구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고 있었는가.
그 모든 질문은 때론 쓰라리지만, 동시에 해방의 시작이기도 하다.
심판의 카드에 그려진 천사는 따라서, 나를 정죄하지 않는다. 과거의 잘못을 벌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실수와 방황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리고 나의 앞에서, 이제 새로운 깨달음과 함께 나아가라는 정진의 말을 전한다. 그 선언 하나로 나는 조금씩 나를 이해하게 된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외부의 박수나 타인의 인정만을 좇지 않는다.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은 어떤 모습인지,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은 무엇인지, 나는 천천히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깨달음은 거창하지 않다. 크게 외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분명하게, 삶의 방향을 바꿔놓는다. 누군가의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던 삶에서, 비로소 내 발로 한 걸음씩 걸어가는 삶으로. 그 발걸음은 아직도 조심스럽지만, 이제는 분명히 내 것이 되었다.
나는 매일같이 나를 다시 부른다. 거울 앞에서, 버스 창가에서, 불 꺼진 방 안에서.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조금씩 응답한다. 괜찮다고. 이제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그 모든 부름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지금의 나를, 나는 비로소 사랑하게 될 준비를 조금이나마 마쳤다.
지금 여기까지 살아온 나에게, 모든 혼란과 실패, 모든 감정의 무게를 안고도 무너지지 않았던 나에게, 정확하게는 무너진 나를 스스로 다시 일으켜 세워 어떻게든 다시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는 나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제 너를 용서해도 돼.”
“이제 너를 사랑해도 돼.”
더 이상은 다른 누구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 안에서 아주 작게 울리는 그 목소리를 따라 살아도 괜찮다고. 그건 가장 진실한 부름이었고, 가장 오랜 기다림이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대답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다시 태어난다. 누군가의 삶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이름으로.
나의 이름을 되뇌며, 나는 그렇게 오늘 하루를 조금 더 나아가게 된다. 언젠가 다시 무너지는 날이 오더라도, 다시 일어날 준비를 마친 채로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