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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이 피는 계절이 온다

by 알펜

머리카락을 파고드는 바람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모자라도 달린 도톰한 패딩을 입었어야 했다는 후회가 종종걸음으로 버스정류장을 향한 발걸음에 매달렸다.


어릴 적의 겨울은 온통 새하얬다. 손가락이 얼게 만드는 추위가 황량한 시골을 덮치고는 했다. 솜 패딩이라도 입고 다녔으면 좋았을 테지만, 막 사춘기에 들어선 선머슴 같은 아이였던 나는 이웃집 언니의 코트가 부러웠다.


예쁜 얼굴로 한창 유행하던 승마바지를 입고 다니던 언니는 패션 센스가 있었다. 언니가 입고 다니는 긴 망토 코트가 언니를 공주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 여긴 나는, 엄마를 졸라 비슷한 모양의 코트를 샀다. 공주가 된 것처럼 몸을 감싸는 코트는 꽤 예뻤지만, 추위를 가려주지는 못했다.


학교에서 집까지는 아이의 작은 걸음으로는 1시간가량을 온전히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매번 푹푹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며 걸어가야 할 때는 손끝까지 딱딱하게 굽은 손가락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박아야만 했다. 망토에 주머니는 어울리지 않는 디자인이었으니까.


눈은 왜 또 그렇게 자주 그리고 많이 내리는지, 온통 새하얀 풍경이 그 해를 감쌌다. 조르고 졸라서 마련한 코트가 춥다고 차마 다른 걸 사달라고 하지 못했다. 집안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던 나는, 키가 커지고 코트의 팔목이 짧아질 때까지 두 번의 겨울을 함께 났다. 추위와 가난은 마치 떼어낼 수 없는 연인처럼 그렇게 다정히 내 곁에 붙어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겨울이 싫었다. 조금이라도 매서운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극렬하게 짜증이 솟았던 건 아마도 싸늘한 온도 그 자체가 싫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손이 곱아드는 추위에 오랫동안 혼자 걸어야 했던 어린 시절의 외로움이 겹쳐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싫어했던 겨울도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자, 마냥 싫지 않았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설경도, 나뭇가지에 매달린 목화꽃 같은 눈꽃들도 아름다웠다. 모든 계절이 각각의 찬란함이 있음을, 그리고 이제는 그 아름다움을 만끽할 인생의 시계추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곱아드는 손끝을 문질렀다. 냉기가 올라오는 온도를 가만히 느껴본다. 겨울이다. 찬란한 눈꽃들이 만개할 계절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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