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보기, 의외로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컨펌받아야 하는데,
본부장님 컨디션 어떤 거 같아?"
"아무래도 점심 먹고 기분 좋을 때
보고 드리는 게 낫겠지?"
분명 같은 보고서인데 상사의 기분에 따라 평가가 달라짐을 경험했다면?
제대로 직장 생활하시고 있는 겁니다.
팀장님의 평가에만 촉각을 곤두세워도 모자랄 판에, 팀장님의 기분을 파악해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다는 이 암묵적인 불문율. 네, 저도 경험했습니다.
지난번 '감정노동'에 이어, 오늘은 '눈치'입니다.
이 지극히 한국적인 정서가 서양의 심리학적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니.
매우 흥미롭죠? (저만 그런가요..?ㅎㅎ)
우리가 왜 이렇게 눈치를 보게 되는지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우리가 서 있는 무대, 즉 '권력 거리(Power Distance)'라는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네덜란드의 사회심리학자 호프스테더(Hofstede)가 제시한 이 개념은, 조직 구성원들이 권력의 불평등을 얼마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지를 나타내는 '마음의 거리'입니다.
짐작하셨다시피, 한국은 상대적으로 '높은' 권력 거리 문화로 분류됩니다. '대표님', '본부장님', '팀장님' 등 직급에 따라 권력이 명확히 구분되며, 이 질서를 따르는 것이 조직 생활의 기본이죠. 상사와 부하 직원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인식되고, 상사의 지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거의 반란(?)에 가깝습니다. 요즘은 조직문화의 긴장이 많이 풀렸다고 하지만, 여전히 생명을 다루는 분야나 제조업의 경우 높은 권력 거리 문화는 산업 특성상 유지되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경사가 가파른 무대에서는 무대 꼭대기에 있는 상사가 가진 권력이 막강합니다. 그의 기분이나 평가는 곧 나의 업무, 성과, 심지어 미래 커리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부하 직원 입장에서 '상사의 감정 상태 = 생존과 직결된 매우 중요한 정보'가 됩니다. 결국 '눈치'는 이 중요한 정보를 파악해 잠재적 위험을 피하고, 칭찬이나 인정 같은 보상을 얻기 위한 고도로 발달된 생존 전략인 셈입니다. 오죽하면 능력 없는 눈치 100단이 임원까지 올라간다는 말이 있을까요.
'낮은' 권력 거리 문화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문화. 스타트업에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수평 문화'입니다. 상사와 부하 직원은 역할이 다를 뿐, 기본적으로 평등한 지위를 갖고 있다는 인식이 깔린 문화인데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자유롭게 참여하고, 상사의 의견에 건설적인 비판과 반대를 제기하는 것에 어떠한 불편도 느껴지지 않아야 합니다. 인턴, 주니어 분들도 지시를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권한을 가지죠.
여담입니다만, 저 역시 3개의 테크 스타트업에 근무했지만 진정한 의미의 '수평 문화'를 경험하진 못했습니다. 아무리 '님' 호칭이나 '영어 이름'을 쓰더라도, 대표 한 사람의 역량에 의존해 빠르게 성장해야 하는 환경에서는 권력 거리가 낮아지기 어렵더라고요. (수평 문화로 유니콘이 된 스타트업이 있다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그렇다면 이 가파른 무대 위에서 우리는 왜 그토록 필사적으로 상사의 기분을 살피는 '연기'를 하는 걸까요?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역할 이론(Role Theory)'입니다.
역할 이론은 우리가 직급, 나이 같은 사회적 지위에 따라 기대되는 행동, 즉 '역할'을 수행한다고 봅니다. '팀장'에게는 리더십과 책임감이 기대되듯, '팀원'에게는 '상사의 지시를 잘 따르고, 팀워크에 기여해야 한다'는 기대가 따르죠.
바로 이 지점에서 두 이론이 만나는데요. '높은 권력 거리'라는 환경은 좋은 팀원의 역할 기대 속에-상사의 권위를 존중하고, 그의 업무를 원활하게 보조하며, 분위기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이라는 항목을 매우 중요하게 만듭니다. '팀장님의 기분을 살피는 행위(눈치)'는 사실, 소심해서가 아니라, '좋은 팀원'이라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핵심 과업이 되는 것이죠. 팀장이 힘들어 보일 때 먼저 나서서 돕는 것은, '팀원'이라는 역할에 충실하려는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인 셈입니다.
결론적으로 '눈치'는 나의 예민함이나 소심함 때문이 아니라, 높은 권력 거리라는 무대(직장)위에서 '좋은 팀원'이라는 역할을 잘 해내기 위한 생존 전략입니다.
그러니 부디 상사의 눈치를 보는 자신에게 죄책감이나 현타를 느끼지 마세요. '내가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가 아니라, '이 정글 같은 직장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나 자신, 칭찬해'가 정신 건강에는 훨씬 좋습니다. 진짜예요.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있습니다. 이 생존 전략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됩니다. 과도하게 상사의 기분을 모니터링하는 데 에너지를 소진하면, 정작 중요한 내 일을 할 힘이 남아있지 않게 되죠. 퇴근 후에 침대에 누워만 있고 싶잖아요? 다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퇴근 후 녹초가 되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을지 모릅니다.ㅎㅎ
눈치 보기? 좋습니다. 회사가 밥 먹여주는 것은 맞지만, 상사도 결국 회사에 고용된 똑같은 직장인일 뿐이라는 점을 기억하세요. 상사의 기분은 업무의 '참고 사항'이지 '원칙'이 아닙니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오늘도 고군분투한 나를 위해 박수 한번 쳐주고, 진짜 중요한 일에 에너지를 쓰자고요.
그러니 마음껏 눈치 보고, 마음껏 생존하세요.
다만, 그 모든 연기가 끝난 뒤에는 반드시 '진짜 나'를 칭찬해주는 것, 잊지 맙시다. 우리 약속!
글쓴이 카리나는..
글로벌 PR과 콘텐츠 마케팅 분야에서 활동해 온 12년 차 홍보/콘텐츠 마케터입니다. IT, 헬스케어, 유통 산업 전반에서 브랜드 론칭과 리드 전환에 전문성이 있습니다.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기업까지 다양한 조직의 성장을 함께 합니다.
현재 초기 스타트업들의 홍보를 맡은 PR 디렉터이자, 연세대학교 심리과학 이노베이션 대학원 사회혁신 심리트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며, “일하는 마음”의 구조와 번아웃, 회복에 대해 탐구하고 있습니다. PR 전문가로서의 경험과 심리학적 시각을 접목해, 직장인의 정신건강과 건강한 조직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글과 영상으로 전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