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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를 내도 공허한 이유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 성과는 대박, 감정은 쪽박이 반복된다면

by 카리나
와, 팀장님! 저희 팀 기획한
유튜브 조회수 터졌어요!

지난 캠페인 대비 상품도
2800% 넘게 팔렸는데요?


밤 11시, 카톡이 울렸습니다.

초저녁 오픈한 고객사 유튜브 콘텐츠가 알고리즘을 탔더라고요. 워라밸을 깔끔하게 지키는 후배가 신난 나머지 '밤늦게 죄송하지만 이번 성과는 너무 기분 좋다'며 연락이 왔습니다.


분명 유튜브 콘텐츠 오픈 소식은 업무 시간 내에 올렸는데, 어찌 된 것인지 자정이 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내 메신저에는 실시간 축하 메시지와 댓글, 축하 이모티콘이 가득했습니다. 심지어 본부장님도 '고생했어요'라는 한 마디를 남기셨죠. 함부로 칭찬을 안 하시는 분이시라 더욱 감사했습니다. 분명 감사한데..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속 한 구석이 싸늘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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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테크 스타트업에서 혼자 개발자들을 따라다니며 준비한 기획안이 덜컥 'CES 2025 혁신상'을 받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어떤 지원도 없이 오롯이 혼자 고군분투하며 저의 강점인 '스토리텔링'에만 집중한 것이 먹혔죠.

저를 포함해 아무도 예상 못 한 쾌거였지만, 정작 저는 번아웃으로 퇴사한 뒤에야 그 소식을 들었는데요. 좋았지만 씁쓸했습니다. 전시회, 투자 유치, 언론 홍보를 연달아 궤도에 올려놓은 뒤 남은 것은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부품' 같다는 느낌과 텅 빈 마음뿐이었거든요. 퇴사 후 들은 수상 소식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더 공허했던 것 같아요.


성과가 터지면 기뻐하면 될 것을, 왜 우리는 종종 마음이 복잡해질까요?

'원래 인생은 이런 거야'라며 정신 차리자는 셀프 가스라이팅일까요? 유독 예민한 걸까요? 나이가 들어 아는 것이 많아져서 일까요?


아닙니다.

이 공허함은 우리 마음의 동기 부여 시스템이 고장 났다는 경고등입니다.




일하는 당신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고장의 원인을 알려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두 가지 동기를 알아야 합니다. '외재적 동기'와 '내재적 동기'인데요.


연봉, 승진, 칭찬, 조회수 같은 것들이 바로 '외재적 동기'입니다. 행동의 '결과'로 주어지는 외부적인 보상이죠. 단기 목표를 향해 달리게 하는 강력한 에너지 드링크지만, 약발이 떨어지면 바로 방전되는 휘발성이 강합니다.


반면, '내재적 동기'는 그 행동 '자체'에서 오는 순수한 즐거움과 만족감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풀었을 때의 짜릿함,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 내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보람 같은 것들이죠. 외부 조건과 상관없이 우리를 꾸준히 나아가게 만드는 강력한 내면의 힘입니다.



재미있는 심리학 실험이 하나 있습니다. 지난 학기, 연세대학교 심리과학이노베이션대학원의 김영훈 교수님 수업에서 알게 된 사례인데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상장'이라는 외재적 보상을 약속했더니, 며칠 뒤 아이들은 상장이 없을 때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보상이 순수한 즐거움을 밀어낸 것이죠. 이를 '과잉정당화 효과'라고 합니다. 대학 시절, 영화 번역가가 꿈이라 취미로 시작한 영상 번역이 돈벌이가 되자 하기 싫어졌던 기억이 스치네요. 여러분도 이런 경험, 하나쯤은 있으시죠?



'성과'는 무조건 나쁠까? 보상의 두 얼굴


물론 월급이나 보너스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우 소중하죠.) 핵심은 그 보상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느냐입니다.


심리학에서는 보상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하나는 '통제적 보상(Controlling Reward)'이고, 다른 하나는 '정보성 보상(Informational Reward)'입니다. 각각을 살펴보면,


통제적 보상: "이 목표를 달성해야만 보너스를 받을 수 있어"처럼,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고 압박하는 보상입니다. 이는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들고 일의 재미를 앗아갑니다.

정보성 보상: "이번 프로젝트에서 보여준 당신의 탁월한 역량에 대한 인정의 표시입니다"처럼, 우리의 능력을 칭찬하고 긍정적인 정보를 주는 보상입니다. 이는 '나 제법인데?' 하는 유능감을 채워주어 오히려 내재적 동기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허했던 이유는, 어쩌면 우리의 성과를 알아주는 방식이 '역량을 인정하는 정보성 보상'이 아닌, 우리를 통제하는 '압박'으로 다가왔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내면의 동력을 만드는 세 가지 핵심 조건


그렇다면 고장난 나의 내면, 동기부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심리학자 데시(Deci)와 라이언(Ryan)은 수십 년의 연구를 통해, 내재적 동기가 발현되려면 세 가지 보편적인 심리적 욕구가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심리적 욕구는 자기 결정성 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 SDT)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요. 자기 결정성 이론은 3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자율성 (Autonomy): 내 행동과 의사결정을 스스로 주도하고 있다는 느낌.

유능감 (Competence): 내 능력이 효과적으로 발휘되고 있으며,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

관계성 (Relatedness): 동료들과 인간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팀의 일원으로서 소속감을 느끼는 것.


이 세 가지 욕구 중, 딱 하나만 제대로 충족돼도 다른 것들을 견인할 수 있는 '대장'이 있습니다. 어떤 것일까요? 바로 '자율성'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주도한다고 느낄 때, 비로소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며 성장하고(유능감), 타인과 진실된 관계를 맺을(관계성) 심리적 기반이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사건 분석:

내 동기는 왜, 어떻게 고장 났나?


자, 이제 이 세 가지 욕구로 제 두 가지 사건을 다시 분석해 볼까요?


사건 1: CES 혁신상 수상 (feat. 고독한 성취)

자율성 & 유능감: ✅ (매우 충족): 어떤 간섭도 없이 오직 저의 역량에만 집중했으니, 자율성과 유능감은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관계성: ❌ (심각한 결핍): 문제는 관계성이었습니다. "오롯이 혼자 고군분투"한 결과, 그 엄청난 기쁨을 진심으로 함께 나눌 동료가 부재했습니다. 퇴사 후에 들은 소식은 성취의 감각을 반감시켰죠. 소속감 없이 이뤄낸 성공은 공허한 자랑에 그칠 뿐이었습니다



사건 2: 고객사 유튜브 조회수 대박 (feat. 통제 불능의 기쁨)

유능감 & 관계성: ✅ (어느 정도 충족): 조회수가 터졌으니 유능감은 채워졌고, 팀원들과 함께 기뻐했으니 관계성도 나쁘지 않아 보였습니다.


자율성: ❌ (의미의 상실): 팀원들과 함께 기뻐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래서 우린 뭘 얻었지?'라는 질문이 맴돌았습니다. 처음 기획 의도는 거의 사라진 채, '매출'이라는 당연한 목표에 맞추었고, 결국 인플루언서의 인지도에 기댄 광고라는 영혼없는 광고 캠페인이라능 생각이 내내 들더군요. 회사의 목표를 위해 영혼없는 커머셜을 보며, 우리가 진정 원했던 '의미를 실현했다'는 자율성이 없다는 사실에 허탈했던 겁니다. 즉, 의미가 빠진 성공은 숫자로만 남고, 마음에는 공허함만 남았습니다.




성과를 내도 공허했던 이유


정리해 볼까요. 성과를 내도 공허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나도 모르게 성과나 보상이라는 '결과'에만 매몰된 나머지, 그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채워져야 할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을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성과는 통장에 숫자를 남기지만, 텅 빈 마음을 채워주진 않습니다. 사실, 복잡하게 생각 안 하고 통장에 찍히는 숫자에 그저 만족하자며 스스로를 타이르는 게 마음 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11년째 반복되는 허무함을 마주하다 보니, 저는 그 감정을 통해 제가 어떤 사람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저를 만족시키는 것은 통장의 숫자뿐만이 아니라, 일하는 과정 속에서 내가 주도하고(자율성), 성장하며(유능감), 연결되어 있다는(관계성) 살아있는 감각이더군요.


결국 우리 기억에 남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장면입니다.

내가 주도해서 무언가를 해냈던 장면,

동료와 웃으며 문제를 해결했던 장면.


오늘 당신의 하루는, 어떤 장면으로 기억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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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카리나는..

글로벌 PR과 콘텐츠 마케팅 분야에서 활동해 온 12년 차 홍보/콘텐츠 마케터입니다. IT, 헬스케어, 유통 산업 전반에서 브랜드 론칭과 리드 전환에 전문성이 있습니다.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기업까지 다양한 조직의 성장을 함께 합니다.

현재 초기 스타트업들의 홍보를 맡은 PR 디렉터이자, 연세대학교 심리과학 이노베이션 대학원 사회혁신 심리트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며, “일하는 마음”의 구조와 번아웃, 회복에 대해 탐구하고 있습니다. PR 전문가로서의 경험과 심리학적 시각을 접목해, 직장인의 정신건강과 건강한 조직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글과 영상으로 전하려 합니다.


https://litt.ly/kar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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