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감정을 연기하는 게,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요?
아영 씨, 표정 관리 좀 해.
팀장님, 요즘 무슨 일 있으세요?
이런 말, 한 번쯤 들어보셨나요?
저처럼 기분에 따라 표정이 잘 드러나는 분은 일 년에도 몇 번씩 들어보실 겁니다. 11년 동안 다양한 회사에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며 나름 표정 관리 내공이 높아졌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듣는 팀장입니다.
재밌는 사실. 코로나 때 마스크 덕을 얼마나 보았는지 모릅니다. 아마 감정적으로 가장 편했던 기간은 재택과 마스크 착용을 했던 코로나 시절일지도요. 목숨을 지키기 위해 마스크를 썼는데, 한편으로는 표정 관리가 힘든 직장인들이 조금은 숨통을 튼 순간이 아니었을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눈으로만 감정을 표현하면 되니 얼마나 편했는지 몰라요. 눈빛 연기도 좀 늘었고요. (ㅎㅎㅎ)
이처럼 우리가 회사에서 실제 감정을 숨기고 다른 표정을 연기하는 것을 '감정노동(Emotional Labor)'이라고 합니다. 보통 항공 승무원이나 간호사처럼 전문 서비스직의 업무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용어죠. 하지만 사무실에 앉아있는 우리도 매일 감정노동 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갓 회사에 들어간 인턴, 신입분들은 상사 앞에서 1. 항상 밝고 2. 의욕적이며 3.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조언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주니어 시절, 혹시나 상사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이 악물고 웃음으로 무장하고 일했던 경험, 저만 그런 건 아니겠죠? 저만 그랬다면 서운할 것 같네요.ㅋㅋ
이러한 감정노동의 개념은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Arlie Russell Hochschild)가 저서 '관리되는 마음(The Managed Heart)'에서 제시하며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혹실드는 한 가지 더 중요한 개념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바로 감정노동을 하도록 만드는, 보이지 않는 '대본'입니다.
사람이 둘 이상 모이면 문화와 규범이 생깁니다. 장례식장에서는 웃으면 안 되고, 결혼식장에서는 기뻐해야 한다는 것처럼요. 혹실드는 이처럼 특정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표현해야 하는가에 대한 암묵적인 규칙을 '감정규범(Feeling Rules)'이라고 불렀습니다.
감정규범이 대본이라면, 감정노동은 그 대본에 맞춘 연기인 셈이죠. 우리는 직장, 학교, 가정 등 사회생활을 통해 이 대본을 끊임없이 학습하고 따르도록 암묵적으로 요구받습니다.
직장에서의 감정규범은 무엇이 있을까요?
회의시간: 개인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진지하고 이성적인 태도로 회의에 임해야 한다. 지루함이나 반감을 드러내서는 안 되며, 필요하지 않는 이상 화는 내지 않는다.
회식자리: 회식은 무조건 즐겁고 활기차야 한다. (=피곤하고 불편한 티를 내서는 안된다.)
보고(report): 상사에게는 존중하고 공경하는 태도를, 부하직원에게는 신뢰감 있는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상사에게 화를 내거나, 부하에게 불안감이나 외로움을 보여서는 안 된다.)
평가: 좋은 성과를 받으면 기뻐해야 하고, 나쁜 평가를 받으면 겸허하고 겸손하게 수용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성과가 좋다고 자만하거나, 나쁘다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자, 그럼 이 대본에 맞춰 우리는 어떻게 연기하고 있을까요?
혹실드는 감정노동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는 '표면 행위(Surface Acting)'입니다. 내면의 감정은 그대로 둔 채,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이나 말투만 바꾸는, 말 그대로 '가면을 쓰는 연기'죠. 진상 상사에게 납득할 수 없는 피드백을 듣고도 표정 관리를 하며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다시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상황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에너지를 많이 소모합니다. 특히 감정에 솔직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면 '겉과 속이 너무 다른 거 아닐까?'라며 스스로에 대한 진정성에 회의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둘째는 '내면 행위(Deep Acting)'입니다. 이건 거의 '메소드 연기'에 가깝습니다.ㅎㅎ 조직이 요구하는 감정을 실제로 느끼기 위해 자신의 생각과 기억까지 바꿔버리려고 노력하는 단계죠.
주로 오랜 직장 생활로 단련되었거나, 수직적인 조직 문화에서 어떻게든 적응하려는 분들에게서 자주 보입니다. 불합리한 피드백을 주는 상사를 보며 '저분도 사정이 있을 거야', '이게 다 나를 성장시키려는 뜻일 거야'라며 스스로를 세뇌하고, 오히려 존경심까지 느끼려고 노력하는 경우죠.
이들은 겉과 속을 일치시키려 하기에 감정 부조화는 적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감정을 억누르고 왜곡하는 과정에서 '진짜 내 감정이 뭐였지?'라며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가면만 쓰는 것보다 장기적으로는 더 위험할 수 있죠.
물론 감정 관리나 표정 관리는 기본적인 사회생활 기술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까요. 우리는 감정노동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 '강도'와 '빈도'입니다.
감정노동이 과도해지면 정체성에 혼란이 오고, 감정이 완전히 고갈되어 번아웃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 내가 지금 감정노동을 하고 있구나"라고 '인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기만 해도, 감정과 나 자신을 분리하여 감정 소진을 조금이라도 완화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한 심리학 연구에서도 감정노동을 인지하고 거리 두기를 할 때 부정적인 영향이 줄어든다(Brotheridge & Grandey, 2002)는 결과가 있습니다.
사회생활에서 그리고 어떤 조직에서든 감정노동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감정노동 중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숨통이 트일 겁니다. 회사에서의 나는 '사회적 자아'라는 가면을 쓴 배우라는 점을 명심하고, 오늘도 고생한 나 자신을 조금은 토닥여주세요. 내가 나에게 '고생했다, 수고했다'며 따뜻한 한 마디를 해주지 않으면 누가 해주겠습니까. 오늘도 열일한 '회사 안의 나'를 위해 딱 한마디만 해주세요.
"연기하느라, 고생했다."
"나 자신을 건사하느라 오늘도 수고했어."
직장인 모드는 내일 아침 다시 켜고, 지금은 진짜 내 모습으로 돌아와 편하게 있자고요. 무려 9시간이나 인생 무겁게 살았는데, 좀 편하게 사는 시간도 하루에 일부분 배정해야 하지 않겠어요?ㅎㅎ
글쓴이 카리나는..
글로벌 PR과 콘텐츠 마케팅 분야에서 활동해 온 12년 차 홍보/콘텐츠 마케터입니다. IT, 헬스케어, 유통 산업 전반에서 브랜드 론칭과 리드 전환에 전문성이 있습니다. 스타트업부터 글로벌 기업까지 다양한 조직의 성장을 함께 합니다.
현재 초기 스타트업들의 홍보를 맡은 PR 디렉터이자, 연세대학교 심리과학 이노베이션 대학원 사회혁신 심리트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며, “일하는 마음”의 구조와 번아웃, 회복에 대해 탐구하고 있습니다. PR 전문가로서의 경험과 심리학적 시각을 접목해, 직장인의 정신건강과 건강한 조직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글과 영상으로 전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