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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리스러브 이유미 Oct 24. 2021

7. 첫 입맞춤

기차여행

"우리 여행 갈까?"

 

"군대 동기가 강릉에 사는데 벌써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았어.

놀러 오라는데 같이 갈래? 친구 집에서 하루 자고 올 거야.”

“둘이? 뭐 타고?”

“기차.”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말하기는 부끄러운데 기차를 타본 적이 없다. 기차가 타보고 싶었다. 그런데 둘만 간다니. '하룻밤을 잔다고? 친구 사이에? 친구 사이니까 괜찮지. 아니지. 아니지. 남녀 사이를 어떻게 알아.' 오락가락 고민했지만 갈 걸 알았다. 기차가 너무 타보고 싶었다. 기차가 움직일 때 정말로 덜컹덜컹 소리가 나는지, 기차에서 삶은 달걀을 먹으면 더 맛있는지, 해변을 달리면 바다가 얼마나 가까이 보이는지, 시골 기차역은 정말 간판이 그렇게 큰지 궁금했다.     


“그래. 가자.”

    

기차역이다. 해피봉이 걸어왔다. 검은색 롱코트를 입었다. 머리색이 이상하다. 보라색? 회색? 흰색? 가끔 노란색도 보였다.


“머리는 뭐야?”

“네가 유지태 좋다고 했잖아. 같은 머리 색 해달라고 했는데 나는 탈색이 안 된대. 3시간 탈색했더니 이렇게 됐어.”


 영화 <동감>을 같이 봤다. 유지태 머리 색이 예뻤다. "머리색 예쁘다." 혼잣말로 했다. 유지태는 은빛이었는데. 다행히 특이한 게 좋아서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한 번의 탈색으로 머리카락은 가늘어졌고, 그 이후 계속 빠졌다.     


우리는 저녁 기차를 탔다. 해가 떨어지고 어두운 철길에 기차가 있었다. 검은색 굴뚝이 달린 기차를 기대했지만 지하철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좌석 번호롤 보며 자리를 찾았다. 해피봉은 창가, 나는 옆에 나란히 앉았다. 해피봉은 어깨가 넓었다. (군대에서 운동을 많이 해서 그렇단다.) 어깨가 닿는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계속 닿아 있어야 하는지 좀 비켜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기차가 출발했다. 문이 열리고 드디어 간식 아저씨가 나타났다. 먹거리가 가득한 4층 바구니를 밀고 왔다. 사이다, 오징어, 쥐포, 달걀, 과자, 초콜릿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뭐 먹을래?”

“음.... 삶은 달걀.”

“그래. 삶은 달걀이랑 사이다 주세요.”


해피봉은 익숙한 듯 주문을 하고, 옆에서 선반을 꺼냈다. 기차에서 먹는 삶은 달걀과 사이다가 왜 맛있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그냥 맛있었다.     

할 말도 떨어지고 침묵이 이어졌다. 졸음이 왔으면 했는데, 정신은 더 말똥 해지고 있었다.


“졸리면 여기 기대서 자.”


'우리는 아직 손도 안 잡았는데 기대서 자라고? 내가 너무 꽉 막혔나? 손은 애인과 잡는 거지만 어깨는 친구사이도 기댈 수 있는 건가? 너무 쉽게 보면 어떻게 하지.' 어깨에 기대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 에라 모르겠다. 살짝 기대어 눈을 감았다. 잠이 와야 할 텐데. 나는 기대면 자니까 곧 잠이 들거야. 잠이 들어야만 해. 어깨는 단단하면서도 폭신했다. 고급 라텍스 같은 느낌이랄까. 심장이 다시 뛰고,  정신은 점점 맑아졌다. 사이다에 각성제가 들어간 게 분명했다. '기대어 있고 싶은데 잠은 안 오고 미치겠네. 그냥 자는 척하자.'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팔이 저린지 어깨를 움찔거렸지만 내가 깰까 조심조심 팔을 주무르는 모습이 실눈 사이로 보였다. 단잠을 잔 척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한다. 3초를 세고, 5배속으로 천천히 눈을 떴다.


“아. 잘 잤다.”

    



친구네 집은 아담했다. 아기도 작았다. 서울에서 온 귀한 손님이라며 상을 거하게 차려주었다. 밥도 배불리 먹고, 기분 좋게 알코올도 들어갔다. 아기를 재운다고 엄마가 들어갔다. 아기가 우니 아빠도 들어가고 둘만 남았다. 허리를 피며 손을 뒤로 짚었는데 해피봉 손가락이다. 그 짧은 스침에 모든 신경세포가 몰려가는 기분이었다.     

“아. 미안.”

“괜찮아.”

“ 나 자야겠다. 졸려.”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올 리 없었다. 거실에서 들리는 미세한 소리에 반응하고 있었다. 상을 옮기며 숟가락 밀리는 소리, 두터운 이불을 내려놓는 소리, 이불을 팡팡 그러다 살살 쓰다듬는 소리. 이내 조용해졌다. 자려나.

그때, 문이 열리고 조용한 걸음 소리. 바닥을 타고 온기가 흘러왔다.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몸을 뒤척이는 척 실눈을 빠르게 떴다 감았다. 해피봉이 팔을 괴고 누워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긴장되었지만 몸이 뻣뻣해지는 기분 나쁜 긴장은 아니었다. 안심되고 설레는 긴장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잠이 들고 있었다.

   

스웨터가 이불을 스치는 소리. 그리고, 멈춤.

빠르게 달음질하는 작은 발소리.

      

솜사탕 같이 달지는 않았지만 보드랍고 따뜻했다.

그 애도 알고, 나도 알지만 비밀이 된 첫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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