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오해
사실을 말하자면,
고백하려던 건 아니었다.
우리가 무슨 사이일까? 동생이 좋아하는 노래라며 이어폰을 꽂아줬다.
애절한 고음, 경쾌한 리듬, 수줍은 가사까지. ‘이런 노래가 있었어? 봉이랑 같이 듣고 싶다.’ 생각했다. 해피봉은 친구들 다 갖고 있던 마이마이(CD플레이어)가 없어, 가요를 노래방에서 배웠다고 했다. 고등학교 합창부 떨어진 건 그 때문이라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믿어줬다.
‘해피봉에게 들려줄까. 크리스마스 이벤트도 고맙고. 가사가 애매한데. 고백 같잖아. 뭐 어때? 가요는 다 사랑 이야기지.’ 워크맨을 빌려 가방에 넣었다.
저녁이면 동네를 걸었다. 놀이터, 분식집, 골목길, 돌담..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은 장소들을 2시간씩 걸었다. 우리는 여전히 손을 잡지 않는 사이였다. 잠깐씩 어깨만 스칠 뿐이었다.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놀이터 가로등 아래 의자는 여행의 종착지였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음료수도 마시고, 봉이 쇼도 구경했다. 개그 흉내내기, 노래, 춤도 추고. 봉이 쇼는 날마다 나를 웃게 했다. 그날은 나의 쇼타임이다.
“이거 같이 듣자.”
“어? 워크맨이네. 나 가져본 적 없는데.”
“응. 그 말이 기억나서 동생한테 빌렸어. 나도 가요 잘 모르는데 이 노래 정말 좋더라. 리듬도 좋고, 노래를 어찌나 잘하는지....”
주저리주저리 부끄러움을 감추며 이어폰 줄을 풀었다. 이어폰을 나눠 끼려니 둘 사이가 멀었다. 엉덩이를 가까이로 옮기고 하나씩 나누어 꽂았다. 트랙 5번. 플레이. CD가 빙글빙글 점점 빠르게 돌아갔다. 최면에 걸렸다. 마법이 일어났다. 사랑의 큐피드가 마법의 가루를 쏟아부었다. 집에서는 들리지 않던 가사들이 귀에 콕콕 박혔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해피봉의 얼굴이 붉었다 웃었다 했다. 드럼 비트, 리드미컬한 건반 소리 모두 사라지고 가사만 들리는 게 분명했다. 입이 귀에 걸린 정도가 아니었다. 눈과 입이 붙었다. 이미 뮤직비디오의 남자 주인공이 되어있었다. 그럴만했다. 가사가 노래 시작부터 끝났다.
“말해야 하는데 네 앞에 서면
아무 말 못 하는 내가 미워져
용기를 내야 해 후회하지 않게
조금씩 너에게 다가가 날 고백해야 해
내 오래된 친구인 널 좋아하게 됐나 봐
아무렇지 않은 듯 널 대해도
내 마음은 늘 떨렸어
미소 짓는 너를 보며
우리 사이가 어색할까 두려워
아무런 말하지 못한 채
돌아서면 눈물만 흘렀어
말해야 하는데 사랑한다고
아무 말 못 하는 내가 미워져
용기를 내야 해 후회하지 않게
조금씩 너에게 다가가 날 고백해야 해
”
박혜경의 <고백>. 제목도 고백이었다. 봉이는 고백받았다. 나는 더 들을 수 없었다. 내 것도 빼서 봉이 귀에 꽂아줬다. 이제 봉이는 몸을 내 쪽으로 돌려 앉았다. 차가워진 내 손을 본인의 두 손 사이에 포개어 넣었다. 어떤 가사가 나오는지 몰랐지만 아마도 ‘내 오래된 친구인 널 좋아하게 됐나 봐.’ 였을 거다. 내 눈을 보며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고백하려던 건 아니었다.
오해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