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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리스러브 이유미 Oct 24. 2021

10. 세상이 멈추다

태풍

매서운 칼바람이 몸속을 파고들었다. 태어나 가장 추운 밤이었다. 2001년 12월 30일 설악산에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그 소식을 듣기 전에 입산한 우리는 알 리 없었다. 사람들이 새해맞이 일출을 보기 위해 바다로 갈 때 우리는 산으로 갔다.   



   

산은 무서운데 자꾸 가잖다. 해피봉은 어릴 때 아버지와 산에 많이 올랐다고 했다. 산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같이 느끼고 싶다고 나만 믿으란다. 겨울 산이 그토록 무서운 줄 알았다면 절대 가지 않았을 거다. 오래된 스키복을 꺼내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털모자, 장갑, 목도리도 둘렀으니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입구에 도착했다. 설악산은 온통 눈으로 덮여있었다. 사람들의 복장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와 달랐다. 스키 막대를 양손에 들고, 발바닥에는 악어 이빨을 붙이고 어기적어기적 걸었다. 키보다 큰 가방에는 뭐가 그렇게 들었는지. 저러고 오르겠다는 건가? 뭔가 이상했다.

     

겨울 산은 재난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신발이 눈에 젖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축축해졌다. 운동화는 쭉쭉 미끄러졌다. 악어 이빨의 용도를 이렇게 아는구나. 해피봉은 괜찮단다. 그냥 가면 된단다. 내가 자꾸 미끄러지니까 누군가 버리고 간 악어 이빨을 내게 신겨주었다. 한쪽이라고 눈에 박히니 살 것 같았다.   

   

높이 솟은 두 봉우리를 이어주는 다리가 나타났다. 철로 만든 빨간 다리는 매서운 바람에 출렁거렸고, 바닥은 얼음판이 얇게 깔렸다. 아래는 끝이 안 보였다.

“나, 못가. 여길 어떻게 건너가. 떨어질 거 같아. 죽일 셈이야?”

“너무 많이 와서 못 돌아가. 내려가다 해 떨어져. 조금만 가면 대피소 나오니까 거기까지만 가자. 내 손잡아.”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와버렸다.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건너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손을 잡고 발을 하나 내딛는 순간 미끄러졌다. 

“악~~~ 어떻게.”

결국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아래 보지 말고 앞만 봐. 할 수 있어.”

한쪽을 잡고 몸을 웅크리고 싶었지만 무게가 쏠려 기울었다. 양쪽 줄을 잡고 몸을 굽혔다. 아래가 보여서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울면 바람길 바람이 눈물길을 얼려 울 수도 없었다. 발에 힘을 주고 어정쩡한 자세로 한발 한발 다리를 건넜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다리를 건너는 것만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 같았다. 누구도 의지할 수 없었다. 나만 믿어야 했다. 잠들어 있던 모든 신경이 일어나 나를 돕고 있었다. 마지막 걸음을 내딛으며 강렬하게 느꼈다. '나 살아있구나.'

      



눈은 쉼 없이 내렸다. 대피소 푯말이 보였다. 살았다. 거대한 산 아래 대피소가 보였다. 이제 경치를 볼 여유가 생겼다.     

“우리 사진 찍을까?”   

  

순간, 

세상이 멈췄다.      


초능력자가 시간을 멈춘 것처럼 그렇게 시간이 멈췄다. 눈이 내리지도 날리지도 않고 눈앞에, 손이 닿는 곳에, 머리 위에, 하늘에, 공기 위에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사진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뭐지? 눈이 눈앞에 멈춰있어.”

“나도 산 많이 와봤는데 이런 건 처음 봐.”       

경이로웠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사진을 찍으려다 피식 웃었다. 세상이 멈춘 게 보이나.

평생에 또 볼 수 있을까. 

2001년 12월 30일. 외계인이 왔을지도 모른다.  

    

대피소를 50미터 앞두고 눈 태풍이 휘몰아쳤다. 대피소 뒤로 보이는 산에서 눈덩이들이 쏟아졌다. 회오리치며 도는 눈에 날아갈 것 같았다. 서로를 지탱하며 대피소에 도착했다. 대피소는 천국일 줄 알았다. 언 발을 녹일 불이 있고, 따뜻한 음식이 있는 곳일 줄 알았다. 아니었다. 얇은 담요 한 장이 전부였다. 태어나 가장 추운 밤이었다. 여벌 옷을 껴입고, 양말을 3개씩 신어도 매서운 칼바람이 몸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죽을 만큼 추웠다. 심장도 얼려버릴 것 같은 추위에 모든 감각이 마비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든 세포들은 생생하게 살아났다. 교묘히 숨어 괴롭히던 기분 나쁜 감정들도 칼바람에 실체를 드러내며 이내 얼어붙었다. 두려움과 분노는 절대 꺼지지 않고, 내 속을 모조리 태울 줄 알았는데 더 센 놈이 나타났다. 생존본능이었다. 살자. 살기만 하자. 다른 감정은 사치였다. 해방감을 느꼈다. 고통이 고통을 치유하는가.    

 

이후 기분 나쁜 상처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일상으로 돌아가니 어느새 다시 녹아들었다. 그래도 나는 봤다. 그 실체들을. 싸울 대상을 알았으니 싸워볼 만하지 않겠나.

      

태풍이 지나간 새벽은 아름다웠고, 우리 모습은 처참했다. 겹겹이 입은 옷으로 관절 인형처럼 뻣뻣했다. 넘어지고, 울고, 깨지며 마침내 대청봉에 올랐다. 정상에서의 풍경은. 직접 가보시라. 산이 내게 말을 걸었다.    

  

“소녀야, 

어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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