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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편지 #9 엄마의 엄마에 대하여

마음 툭 터놓고 말할 수 있는 모녀 관계

by 강혜진

다음 주 금요일이 외할머니 생신이어서 미리 이번 주말에 생신 파티를 하자고 외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단다.

“엄마,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다음 주 금요일이 엄마 생일이던데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요.”

늘 우리 가족이 찾아뵈러 가면 근사한 식사에 너희들 용돈까지 챙겨주시는 외할머니가 이번에도 또 그럴까 봐 내가 맛있는 걸 사드린다고 이야기했지. 그런데 전화기 너머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리더구나.

“더운데 뭐 하러 아이들 다 데리고 여기까지 와. 괜찮다고 해.”

외할머니는 엄마가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와 헤어지고 다른 분과 결혼하셨어. 그분을 차마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었단다. 이십 년이 넘도록 그분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건 그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어. 외할아버지에게 못할 짓이라 여겼기 때문이지.

“우리 다 가면 또 저녁사고 애들 용돈까지 주면 부담되지? 그럼 이번에는 용돈 좀 두둑하게 보내드려야겠네. 엄마도 덥고 피곤한데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세요.”

안 만나겠다고 전화를 끊었는데 참 속이 상하더라.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섭섭한 걸 아직 말 못 하겠더라. 열한 살 된 나를 두고 가버린 외할머니가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 어쩔까 싶어서. 그래서 다 크고 나서 외할머니를 만났을 때에도 내가 어릴 때 왜 이혼이라는 선택을 했냐고 물어본 적이 없었단다. 외할머니가 가슴속에 늘 커다란 돌덩어리를 얹은 것처럼 편치 않았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외할머니는 엄마가 대학 다니고, 졸업하고 결혼하고 너희들 돌잔치할 때도 맘 편히 엄마 앞에 나타나질 못했어. 엄마에게 엄마 노릇을 못해 주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엄마 대접받으려고도 하지 않았어. 결혼식에 참석해 달라고 말하지 않는, 아이 돌잔치에 와서 식사 한 끼 하고 가라고 말하지 않는, 명절엔 외할머니의 시댁 식구들과 어울리라고 그저 전화 한 통 드리고 찾아가지 않는 딸에게 섭섭하단 말도 한마디 못 하는 외할머니에게 엄마는 참 무심하고도 차가운 딸이었단다.

그런데 이제 다 늦게 효도하고 싶은데 엄마는 마음이 쓰이는구나. 나를 배려해서 힘들게 오지 말라는 그 말속에 혹시나 외할머니와 아저씨의 부담이, 눈치가 섞여있지 않을까 지레 걱정이 되어서 말이지.

세상 많은 사람에겐 눈치가 보이고 할 말도 참아지지만, 부모에겐 쉽게 속상하고 섭섭함을 털어놓게 되잖아. 부모 자식 간에는 듣기 싫은 소리를 해도 돌아서면 금방 잊어지고 다시 또 없던 일처럼 웃어지잖아. 그런데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그게 안 돼. 자꾸 머뭇거려져. 세상에서 제일 힘든 사람이야. 그래서 울컥 슬픔이 밀려올 때가 있어. 가까이에 있는 엄마를 엄마처럼 대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하고 이럴 수밖에 없는 처지가 원망스럽단다. 그런데 이런 마음이 외할머니께 전해질까 봐 엄마는 화를 낼 수도 울 수도 없단다. 그런데 더 슬픈 게 뭔 줄 알아? 외할머니도 나랑 똑같다는 거. 분명 섭섭하고 힘들 때가 많을 텐데 보통의 엄마들같이 딸인 나를 대하면 내가 속상할까 봐 그러지 못하는 게 느껴지거든.

외할머니와 엄마의 관계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차차 온기가 돌고 편안해질 거라고 믿어. 단 둘이 여행도 가고 소주잔도 기울이며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실컷 울고 화해할 날이 올 거라 믿거든.

엄마는 주원이, 주하에게 보통의 엄마처럼 혼내고 짜증 내고 다투고, 그래도 자기 전엔 꼭 끌어안고 아까 화내서 미안했다고, 네가 이래서 섭섭했다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마음의 앙금이 남을까 봐 걱정하느라 에너지 허비하지 않고 한껏 표현하고 마음껏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행복이 행복인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외할머니 덕분이구나.

엄마가 외할머니께 보통의 딸처럼 눈치 보지 않고 마음 툭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딸이 되도록 손자, 손녀인 너희들이 잘 코치해 줘. 나는 외할머니의 부재를 긴 세월 견뎌왔지만, 너희들에겐 외할머니가 부재한 순간이 없었으니 말이지. 딸인 나보다 손자, 손녀인 너희를 더 편안하게 대하는 외할머니께, 앞으로 엄마랑 같이 사랑을 되돌려 드리자! 도와줘.

사랑하는 아들, 딸, 오늘도 굿 나이트!

2025. 8. 24.

사랑하는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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