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달려서 행복합니다
"달리기 좀 가르쳐 줄 수 있어요?"
우리 팀에 일 년 넘게 같이 근무한 분이지만 대화를 몇 번 해보지 않았다. 늘 단정하고, 정확하고, 불필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좋은 인상이었지만 다가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분이 부탁을 하는 것이다.
배경설명은 이렇다. 아이가 수능을 쳤다. 자녀를 돌보느라 희생한 내 몸을 이제는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건강검진을 하러 갔더니 고지혈증이란다. 그래서 운동을 시작했다. 자전거도 타고, 달리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달리다가 무릎이 아팠다. 내가 달리기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퇴근 후 달리기를 하기로 했다. 마침 우리 회사 근처에 러너들의 성지인 경복궁 돌담길이 있다. 경복궁 돌담길은 정말 추천할만한 러닝 장소이다. 둘레가 2.5km, 두 바퀴면 5km, 네 바퀴면 10km라서 거리측정하기 쉽다. 그리고 적당한 경사가 있어서 (사실 직접 뛰어보면 적당하다고 하기에는 상당히 힘들다) 업힐 훈련도 된다. 폭도 넓어서 다른 러너나 보행자와 부딪힐 위험도 적고, 무엇보다 궁과 가로수와 청와대가 보이는 풍경이 참 예쁘다.
중간에 청와대가 보이는 지점에서 한번 쉬고 한 바퀴 달리기로 했다. 자박자박 발맞추며 곁눈질로 자세를 봤다. 무릎 통증이 있다고 했기 때문에 몸의 무게중심을 위로 두는지를 확인했다. 고개를 들면 무게가 아래로 실리는 것을 줄일 수 있어 무릎이나 발목에 주는 부담이 적다. (머리가 생각보다 무게가 꽤 나간다.)
이렇게 우리는 몇 달을 달렸다. 이제 그분은 10km를 달릴 수 있게 되어 다음 달에 함께 첫 10km 대회에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10살의 나이차이를 극복한 친한 동료가 되었다.
함께 달리기를 하면서 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함께 달려도 상대방의 달리기를 내가 대신해 줄 수 없다. 달리기를 온전히 내 몫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짐을 대신 들어줄 수 없고 내 짐을 대신 져달라고 할 수도 없다. 나의 인생의 짐은 결국은 내 몫이다.
함께 뛰면 상대의 페이스에 맞춰야 한다. 빨리 달리고 싶어도 속도가 느린 사람에게 맞춰야 한다. 관계에서도 나보다 느린 사람을 위해 조언을 해줄 수 있어도 속도 자체는 그 사람의 속도에 맞춰야 한다. 누군가를 도와준다고 멱살 잡고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함께 달리면 혼자 달리는 것보다 오래, 꾸준히 달리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함께 있는 사람에게 힘을 얻어서일 수도 있고, 나 혼자서는 포기할 수 있지만 그 사람까지 포기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책임감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가 어떻든, 함께 가면 신경 쓸 일이 많고 당장은 천천히 가는 것 같아도 길게 봤을 때는 더 멀리 간다. 그렇기에 우리는 함께할 사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