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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n Feb 13. 2020

시간을 쥐는 일

"완고함"과 "견고함"의 차이


"시간을 쥔 손들은 견고하다

견고한 것으로 부드러울 수 있다"

김현, "노부부" <입을 열면> 중에서.



선생님과 점심을 먹고 오는 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어제의 길지 않은 대화는 인간의 '완고함'에 대한 것으로 수렴됐다. 그리고 오늘 김현 시인의 "노부부"라는 시를 읽다가 어제의 대화가 다시 떠올랐다. 시인이 말하는 '견고함'이 어제 나눈 대화 속에 있는 '완고함'을 불러낸 것이었다. 많은 것들은 스스로 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과 비견되는 것에 의해서 제대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완고함'*은 바꾸지 않는 것이고,  멈춰 선 것이다. 

'견고함'**은 바뀌는 것 가운데 중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옆으로 비켜서 서 있을 수도 있다. 


결국 손에 무엇을 쥐고 있는지가 '견고함'과 '완고함'의 차이를 낳는다. 그리고 시간을 쥔 손을 가진 사람만이 견고할 수 있고, 또 견고한 사람만이 부드러울 수 있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다. 손에 움켜쥐고 멈춰 세울 수 있는 성격의 것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시간을 손에 쥐려고 한다면, 쉼 없이 손을 오므렸다 펴면서 시간에 섞인 감촉을 기억하고 곱씹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손에 쥔 시간은 인간을 다른 존재로 탈바꿈시킨다. 


오랜 시간 동안 그 감촉을 느끼면서 아파보고, 쓰라려보고, 때로는 잊을 수 없는 따스함을 기억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사랑할 것'과 '어느 때에나 경계해야 할 것'에 대하여 안다.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은 지켜야 할 것을 명확하게 알고서 세상 속에서 휘청거리는 온당한 것과 부당한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에서 휘둘리거나, 쓰러지지 않고 견고하게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중심이 있는 견고한 사람만이 부드러울 수 있다. 


세상의 많은 것, 아니 거의 대부분의 것의 정체와 본질은 감춰져 있다. 고운 말 안에 독이 있기도 하고, 거친 행동 안에 따스한 체온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래서 본질에 닿으려면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겉이 사라지고 속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해할 수 있어야만 부드러울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견고한 사람은 그 수많은 속내가 자신의 것처럼 버텨온 시간의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배척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부드러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에 섞인 것들 중에 하나만 쥐고, 그것이 자신이 쥔 시간의 모든 것이라 믿는 사람은 시간이 흘러도 멈춰서 있을 뿐이다. 곧 완고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과거의 영광이든, 과거의 상처든 그것만으로 버텨온 세상에 중간지대는 없기 때문이다. 중간이 없는 땅에서 머뭇거림은 없고, 머뭇거림이 없는 곳에서 겸손이 없기 때문에 오직 친함과 배척만이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완고함을 만든다.


가끔은 손에 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손에 남은 감촉이 무엇인지, 이따금 손에만 집중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융통성이 없이 올곧고 고집이 세다.

**사상이나 의지 따위가 동요됨이 없이 확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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