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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n Sep 12. 2020

내 나이 서른 살에는

어느 에세이를 읽고

삼십대를 기록한 에세이를 보고.



어느 시인은 ‘스무 살’과 ‘스무 살이 아닌 것’으로 삶을 나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삶이 점차 내 손에 쥐어지기 시작하며, 무언가 하나 제대로 쥘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십 대와, 내가 ‘쥘 수 있는 것’과 ‘쥘 수 없는 것’이 조금은 분명해지기 시작하는 이십 대 이후의 삶으로도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스물아홉은 쉽지 않고, 서른은 생각보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서른에 다다랐을 때, 막연한 기대에 좌절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점차.

그러나 서른과 하이파이브하며 손을 맞부딪히고 나서 살아가야 하는 삼십 대의 일상은 결코 가벼운 것 같지만은 않았다. 스물아홉에 겁냈던 서른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걱정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지나쳐온 이십 대의 어딘가에 있었는지, 아니면 각색되어 반쯤은 있고, 반쯤은 없는 내 모습을 기준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삼십 대, 나의 ‘별 것 없음’을 깨닫는 것이 내게는 받아들이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내 삶에서 결코 자유분방하지도, 자유롭지 못했지만, 마음이 더 쫄리는 서른 살 나는 이십 대의 신기루에 비춰 정말 별것 없었다.

반복하듯이 비슷한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는 나와, 흡사 기시감이 들면서 갑작스럽게 나를 덮치던 힘겨운 일들은 이십 대이던 지난날의 내게는 ‘실수’나 ‘시행착오’처럼 밀어놓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들이 모두 내 패착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러나 서른을 지나친 내게는 의미가 달랐다. 마치 ‘쓰지 않는 근육’과 ‘자주 쓰는 근육’으로 나뉜 내 몸이 약간은 틀어지고, 그래서 불편하지만, 통증을 없애려고 애써 자세를 고쳐 잡을 때에는 더 큰 괴로움을 주기에 그대로 방치해두곤 하는 것처럼 되었다. 문제가 되는지 알았지만, 고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내가 진짜 별로구나’하고 생각하게 되곤 했다.

서른이 되었던 그 시점의 나는 유난히 최승자를 꼼꼼히 읽고, 양희은을 열심히 들었다. 나는 그것들을 통해서 내가 살아가는 ‘나이’를 규정하려고 애썼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시간이 내게 던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이유 없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이십 대의 내가 내 삶에 대해 ‘나이브(naive)’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대로 둘 수 없는 나의 ‘별 것 없음’과 ‘별로임’을 최승자의 서른과 마흔으로, 양희은의 마흔이 남긴 마음속 심상으로 희석시키려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른’에 대한 기록이 유난히 나는 반갑다. 누구나 겪어보면 안다고 하지만, 겪지 않은 것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것이 내가 겪는 것들이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님을 알려주는 것들이 진정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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