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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n Oct 02. 2022

네 길로만 가.

1.

할아버지께서 내게 해주신 마지막 말씀은 "네 길로만 가"였다.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니 질로만 가이'이렇게 말씀해주셨던 것이다. 이 말씀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뵙고 나오는 길이면 항상 해주시던 것이었다. 할아버지 생전에 마지막으로 찾아뵙던 그날에도 내게 또렷하게 그 말씀을 해주셨기에, 나는 일상적이지만 마지막이 된 '특별한' 말씀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말씀을 들었던 마지막 날을 스물한 살이던 해의 5월 어느 날로 기억한다. 스무 해 가까이 시간이 흐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내 삶에는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나는 이따금씩 그 말씀을 꺼내보고는 한다. 삶의 부침이 생겨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진정 내가 가야 하는 길인지, 내게 어울리는 길인지 자문할 때 이 말씀을 꺼내놓는다. 그리고 기로에 섰을 때, 선택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떠올린다.



2. 

할아버지께서 가라고 하셨던 '내 길'이 무엇인지 아무도 가르쳐준 적이 없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해석하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 되곤 했다. 내가 가야 하는 길인지,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길인지, 내가 가면 좋은 길인지 정해진 답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날은 '도덕'으로, 어느 날은 '윤리'로, 어느 날은 '욕망'으로 그 기준을 정해서 답하고는 한다. 


판단의 기준 하나를 정하더라도 답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내 길'을 정하기 위해서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규정해야 했지만, 나는 가끔 나를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은 변화를 꿈꾸는 내가 나였고, 어느 날은 지금 가던 길을 지키려는 내가 나였다. 그렇게 줄이더라도 나는 '나'를 잘 정하지 못하곤 했다. 내가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며 살고 있는가, 하고 계속해서 반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하지 못한' 것들을 때에 따라 달리 정하며 살아온 탓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말씀은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떤 답을 내리고,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이해하는 길잡이였다. 나는 질문 속에서 길을 잃곤 했지만, 그것은 허허벌판에서 길을 잃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경계 안에서 끝이 있을 법한 잃기를 할아버지 덕분에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

지금 나는 뜻하지 않는 순간에 뜻하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 큰 기로에 섰다. 그리고 내가 택할 수 있는 두 가지의 길 앞에서 나는 할아버지께서 내게 해 주신 그 귀한 말씀을 다시 꺼내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내가 놓친 것은 없는지 내가 이르렀던 결론과 그 근거에 물음을 제기했다. 그리고 어떤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가 누구인지 생각하고, 규정해야만 했다. 어느 역사가는 자기 인식을 자신이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를 통해서 미래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 말이 참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것 말고 달리 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은 같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했는지 곰곰이 확인해봤다. 그리고 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내게 던진 파장은 무엇이었는지 확인해봤다. 그리고 미래에 비슷한 선택을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봤다.


한편, 어느 철학자는 인간에게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음'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갈파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과거와 등지며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기 인식의 불가피한 방법 속에서 예외를 두는 것, 과거의 사슬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만드는 삶의 장치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음'인 것이다. 나는 내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 물었다. 


결국 나는 내 길로만 가기 위한 선택을 하기 위해서 '과거의 힘'과 '미래의 힘'을 싸움 붙였던 것이다. 싸움의 현장에서 중앙에 있던 것은 과거의 힘들이었다. 그리고 미래의 힘이 주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다. 어떤 과거와 미래가 힘 있는 줄 알고 살았는데, 실상 힘이 없었다. 어떤 그것들이 힘을 잃었다 생각했지만, 힘이 셌다. 



4.

복잡한 과정이었지만, 이제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내가 이른 결론이 내 길로 가기 위한 하나의 해답이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길잡이 삼아 가려는 것이다. 내가 내린 답이 어떤 답인지, 답이어야 하는지 할아버지께서 알려주셨음을 다시금 떠올렸다. 이제 나는 다시 나를 나다운 방식으로 사랑할 일이 남았다.


지금 이 상황이 두렵지 않은 것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동안 사랑해주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책하기만 했던 나를 다시 사랑해줘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나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간절히 필요하기에 두려움 속에서 용기를 내며 내 길을 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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