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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n Jun 28. 2023

불안의 피로감

불안(anxiety)은 공포의 일종이다. 그러나 공포와 불안으로 달리 명명하듯이 둘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일반적 의미에서 공포는 구체적 대상에게 느끼는 회피하고 싶은 부정적 감정을 뜻한다. 이와 달리 불안은 대상이 불분명한, 혹은 대상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그래서 전자를 외적 공포(outer fear)로, 후자를 내적 공포(inner fear)로 분류하고는 한다.


불안은 알 수 없음(unknowability)에서 유발되는 것이며, 그것이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런데 과연 '알 수 없음'이라는 것에서 삶에서 무엇인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것들에 대해서 몰라서 나 아닌 타인이 누구인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없는 상태와 같다고 이해하고 있다. 다만, 불안이 내포하는 불가해적 상태가 구체적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어젯밤에 갑자기 몇 가지 질문이 불현듯 떠올랐다.


왜 쉬지 못할까,

왜 놀지 못할까,

왜 떠나지 못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불안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믿고 싶지만, 언제나 확신하기 어렵다. 늘 다른 행동을 하고, 늘 여러 가지를 바라니까.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지만, 그것이 아닌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 지금 하는 일을 사랑하지만, 다른 길이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어딘가로 가고 싶지만, 그곳에서 내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생각을 할지 알 수 없다. 떠나는 것은 미지 속에 미지의 나를 만나는 알 수 없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나의 믿음이 붙잡고 있을 곳이 없다는 생각, 그것 때문에 불가해성의 문제에 빠지고, 불안을 느끼며 쉬지도, 놀지도, 떠나지도 못하는 언제나 '현재 진행 중'인 상태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이 던지는 언제나 진행 중인 삶, 그 삶이 쉬지 않고 생산하는 피로감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뚜렷한 규범을 가진 공동체에 속하는 것, 신앙을 갖는 것 등이 이론적으로 가능한 해법 같다. 이것은 흐르는 강물에 맡긴 몸을 어느 아름드리나무에 묶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느 철학자가 폴리스에서의 삶이 끝나고, 근대가 왔을 때, 인간은 자신의 삶, 혹은 그 삶의 의미를 결정해 주는 가치 또는 신념체계를 잃었기 때문에 불안해졌다고 했으니까. 근대적 삶으로 닿는 길의 반대 방향으로 가면 불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이 해법이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어딘가에 묶이기에는 자유에 대한 기대가 크다. 어느 중간 지점을 찾고 싶지만, 언제나 중간의 행방은 찾기 어렵다. 답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지만, 답이 있는 것 같지 않다. 현재로서는 어떤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때까지, 더 이상 다른 것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길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지향하며 살아보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즐거운 일들이 적지 않지만, 피곤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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