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시인의 "사랑법 첫째"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자신의 기대가 지나쳐 사랑하는 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이 아니게 되지 않도록 기대하는 마음의 반대편에 누름돌을 올려두고, 기대가 그대를 넘지 못하게 한다는 내용의 시입니다. 고등학생일 때, 서점에서 당시 꽤나 유명했던 정지영 아나운서가 엮은 시집에서 처음 보고, 사랑하게 됐던 시입니다.
사랑하고 싶을 때, 그리고 사랑하게 된 때에 꼭 한 번씩은 이 시를 떠올리고는 했습니다. 한동안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사랑할 때, 사랑에 상처 입히지 않으려면 사랑하는 마음 반대편의 돌덩이로, 기대하는 마음에 중용의 미덕을 더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요즘 인간관계에 한정하지 않고, 살아가며 가끔씩 꺼내 읽고 생각해 보면 좋은 시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일이 어떤 면에서 사랑하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 사이에서 쉼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일 같기 때문입니다.
오래간만에 강의를 하며, 학생들에게 고정희 시인의 "사랑법 첫째"를 낭송해 주었습니다. 12월 1일 월요일 1교시 수업이었습니다. 각자의 세계관, 각자가 신뢰하는 이론에 따라 세계를 바라보고 그러한 관점에 따라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 것이 일상이기에 자칫 자신의 관점에만 기대어 현실을 현실로서 마주하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시를 낭송했던 것입니다. 곧 자신도 모르게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동안에 판단과 결정의 기준을 맹신함으로써 일을 그르치지 않으려면, 자신이 가진 기준과 상반되는 관점에서 자신의 기준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내리고 있는 판단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사랑법 첫째"의 마음 반대편 돌덩이를 공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딘가에 치우치지 않게, 무언가 맹신해서 진정 중요한 것을 망각하지 않게 하는 무엇으로서의 돌덩이는 생각해 보면, 남명 조식 선생이 항상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는 "성성자"라고 하는 방울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치우치지 않으려면, 균형점이 어디에 있는지 찾으려고 깨어있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바삐 살다 보면, 판단과 선택의 근본적 기준에 대해서 생각하기 어렵게 됩니다. "효율"과 같은 개념이 보편적인 판단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가시적이고, 그래서 받아들이기 비교적 쉬우니까요. 하지만 하나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에 치우친 것이 됩니다. 치우친 반대편에는 진정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이 있을 수 있고, 또 적절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더라도 균형점을 찾기 위해 깨어있고, 균형을 만들기 위해서 반대편에 돌덩이 하나 둘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사랑법 첫째"를 낭송해 줬던 것은 아마 제게 반대편 돌덩이의 의미를 돌려둘 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판단하고 선택하게 했던 이론의 실패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되었고, 이론을 폐기하지 않더라도 개선할 때가 되었음을 인정할 때가 되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몸이 무겁지만, 다시 깨어있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사랑법 첫째
고정희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