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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n Jan 19. 2017

경계, 나와 당신의 거소

연애법 셋째

  연인을 만나 사랑의 이름 아래 온전한 결합을 이루는 것만큼 삶에서 이룰 수 있는 가치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연인의 결합은 비단 사랑이라는 울타리에서 충만해질 수 있는 드문 경험이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 결합은 자아의 성장과 완성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더욱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 주지하듯이 우리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서 "나"의 외부에서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주어야 주름지지 않고 온전한 모양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연애와 같은 관계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다양한 외부로부터 사랑이라는 헬륨 가슬를 공급받을 수 있다. 부모, 친구, 선생님 등 우리에게 사랑을 공급해주는 외부의 대상은 나열하기 힘들만큼 많다. 그러나 연인 아닌 타인으로부터의 사랑은 연인이 주는 그것에 비하여 강도와 지속성, 무엇보다 자신이 내어준 자리의 크기에서 비교할 수 없을만큼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부모의 사랑은 무엇에 비할 수 없을만큼 강도와 지속성이 크지만, 우리가 내어준 자리가 연인의 자리보다 크다고 할 수 없으며(내리사랑이 어찌 치사랑에 비할 수 있을까?), 친구, 선생님 등도 어런저런 이유에서 연인으로부터 공급되는 사랑에 비하기 어렵다. 우리의 자아상은 연인의 사랑을 통해서 비로소 온전한 형태가 된다.


  연애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타인과 결합하려는 욕망에 찬 시도이며, 사랑 아래 정렬된 관계의 형식이 갖는 이름이다. 다시 말해 연애는 호감이 가는 사람과 연애하며 사랑이란 이름 아래 상대를 정립시킬 수 있을 것인지 판단하기 위한 목적에서 자아를 한정된 틀 속에 구속하여 시험하는 작업을 일컬으며, 사랑하기 때문에 관계의 새로운 이름인 "연애" 안에 묶는 집합을 일컫기도 한다. 각자에게 연애가 갖는 의미의 차이만큼 연애는 그 결합의 강도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모든 연애는 연인 사이의 결합 강도에 따라 이념형으로서 "해체"과 "융합" 사이 어느 지점에 위치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해체할지도, 융합할지도 모르는 불안을 내포한 지점에 위치한다. 연애에 대한 욕망은 끊이지 않는 연애하려는 행위의 원천이지만, 대상을 특정한 욕망의 지속을 결코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연애 아래에 묶인 나와 연인은 본래부터 다른 특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연애의 집합이 언제고 다르게 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불변하는 사랑의 관계로서 연애를 꿈꾸지만 불변이란 없는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연애를 기억할 때 끄집어내어진 기억은 허탈, 고난, 후회로 수렴하는 것은 연애가 해체와 융합 사이의 불안정한 결합 어느 한 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연애의 위치가 낳는 불안은 좋은 연애에 대한 각자의 형상을 만들고, 그것을 향해 연인의 진로를 정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해체와 융합 사이 어느 지점에 위치할 좋은 연애에 대해서 두 가지로 떠올리는 것 같다. 첫째, 좋은 연애란 나와 연인 사이의 화학적 결합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화학적 결합으로서 연애란 상대에게 적극적으로 침투하여, 상대가 독자적으로 가졌던 비밀의 영역을 일소하고, 내가 상대의 세계에서 어떤 벽에도 부딪힘 없이 상대와의 융합하여 경계가 불분명한 영역, 곧 우리의 연애라는 영역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자면 나와 당신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나의 마음과 상대의 마음이 별다른 조정이 필요없이 같은 주파수에 맞춰서 매끈한 음질의 소리를 세상을 향해 내는 것이 화학적 결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학적 결합이 이루어졌다고 믿었을 때,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하곤 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


  화학적 결합으로서의 연애는 결국 어떤 의미이건 "사랑"이란 이름 아래 놓인다. 연애하는 사람 대부분이 이 사랑, 곧 상대와의 화학적으로 결합할 때 비로서 좋은 연애의 결실을 맺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때 비로소 연애가 안전하다고 믿는다. 곧 자신의 개성에 연인의 개성이 붙어 서로 닮은 제 3의 개성이 나를 대표하게 될 때, 혹은 우리의 공동체성이 개성을 대표할 때 우리의 연애가 안전하다 믿는 것이다.


 이와 같은 판단은 일견 서로 다른 개성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각자의 개성은 자신만의 특수한 질감을 갖는데 어떤 것은 날카롭기 한없고, 어떤 것은 부드럽기만 한 재질을 갖는다. 화학적 결합으로서의 연애를 옹호한다면  "모난 개성은 서로 만나 충돌하여 서로에 상처를 내기 쉽고, 부드러운 그 무엇은 정전기를 일으키켜 따끔 거리게 하고,(그것은 사랑의 전류가 아니다.) 모난 것과 부드러운 것의 만남은 모난 것이 손상을 줄 것이다. 따라서 개성이 닳아서 서로 상처입히지 않는 것이 된야만 안전지대를 가질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곧 그들의 결론은 화학적 결합으로서의 연애만이 궁극적으로 안전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에 내재된 본질은 다음과 같다.


  "개성 = 불안의 이유"


  화학적 결합으로서의 연애에 대한 믿음은 타당하고, 아름다운 결실을 맺기 위한 바람직한 미래상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현실이 될 수 있으며,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좋은 연애의 지향점일까? 단언컨대 아니다. 그것은 연애의 현실이 아니며, 좋은 연애의 바람직한 미래상조차 되지 못하다. 바람직하지 못하더라도 아름답기만 하면 될까? 그렇지도 않다. 연애는 생활이며, 멈춰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기를 불어넣어 아침에 눈 뜨고, 만나고, 사랑하고, 잠들어야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아름다움만으로 무엇하나 이어갈 수 없다. 곧 현실이 아닌 것에 발붙이고, 괴리된 낭만적 미래상에 근거해서 연애를 끌고 나갈 수 없는 것이다.


현실과 현실다움이 붙은 연애의 모델을 찾고 거기서 바람직한 태도와 행위를 모색하는 것이 좋은 연애를 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잼처럼 달콤하지만, 인생이라는 빵과 함께 먹는 것이 좋다."라고 탈무드는 말한다. 좋은 연애란 잼이 적절하게 발린 빵이다. 너무 달아 목 마르지 않고, 적당한 영양을 공급해서 삶을 꾸릴 수 있는 것, 그것이 좋은 연애이다. 그리고 좋은 연애를 위해 네비게이션에 입력해야할 목적지는 결코 화학적 결합의로서의 연애가 아니다.


  연애는 화학적 결합이 아니다. 연애는 온전한 자아의 영역이 독립적 영역으로 맞대고 있는 상태에 가깝다. 각자의 개성이 상대방에게 옮겨붙어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결합되지 않고 연인의 경계 밖에 존재하는 개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연애이다. 나는 당신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지만, 내가 곧 당신일 수는 없다. 내가 연인에게 서로 비슷한 점을 발견했을 때 느끼는 희열은 어떻게 이렇게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는 존재인 나와 당신 사이에서의 "같음"이라는 특이한 발견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같음이 아니라, 특이로부터 희열은 온 것이다. 뒤집어보면 평범한 건, 일상적인 것은 나와 당신의 다름이며, 다름이 연애의 기본형인 것이다.


  다시 풍선의 비유로 돌아가면 풍선의 모양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외부에서 들어온 헬륨이지만, 풍선은 고무로 만들어진 원래의 형상을 갖고 있다. 어떤 풍선은 둥글지만, 어떤 풍선은 길다. 곧 풍선은 저마다 개성을 갖고 있다. 연인은 서로에게 사랑이란 내용의 헬륨을 공급하여 각자 온전히 자신들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결국 외부로부터 공급된 사랑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은 전과 다른 내가 아니라, 더 나다운 내가 되는 것이다.


  연애는 사랑에 의해 채워진 둘, 혹은 그 이상의 풍선이 맞댄 모습이다. 파랑 풍선과 빨강 풍선이 만나 보라 풍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빨강 고무와 파랑 고무가 경계를 맞딱뜨린 모습을 한 것이 우리의 연애의 진정한 모습에 가깝다. 따라서 화학적 결합으로서의 연애가 존재하리라는, 혹은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연애의 결실이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개성의 존재를 연애의 불안을 낳는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맞지 않다. 개성이 존재하지 않는 연애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계 밖에 존재하는 나는 우리가 존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연인은 나와 당신의 결합이지, 나와 나의 결합이 아니다. 설령 나의 개성을 구성하는 요소가 '우리'라는 이름 아래 재구성된다고 할지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나의 완전한 탈각은 아니다. 그간 나의 특질을 구성하던 개성의 구성요소의 안에는 나의 경험, 지식, 감정이 여전히 특징을 이루기 때문이다. 구성요소의 결합방식의 변화는, 이를테면 탄소의 결합방식의 변화는 흑연이 다이아몬드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본디 탄소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는 변화가 없다. 곧 어떤 기준에서 더 가치있는 존재가 될지 모르지만, 나는 여전히 나인 것이다.


  다만 나와 당신 사이의 경계를 둔 맞댐만이 유일한 모습은 아니다. 연애는 풍선이 불릴 공간 그 자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연인이 마치 하나의 모습처럼 보이는 것은 화학적 결합의 결과가 아니라, 연인이 결정한 공간의 크기와 모양이 결정한 결과라고 할 수 있 있다. 어떤 연인은 동그라미로, 어떤 연인은 별로 보이는 것은 연애라는 공간의 모습이지, 그 안의 나와 당신의 다른 그 무엇은 아니다. 그 공간이 채워질수록 본디 하나였던 것처럼 보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사랑이라는 내용의 헬륨이 가득 들어가 자아를 키워갈 수록 연애라는 이름의 공간은 채워진다. 공간이 채워질수록 연인과 나 사이에 맞댄 경계는 촘촘해진다. 그러나 가득 채워진 자아의 뭉치들이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 것만은 아니다. 제한된 공간에 채워진 자아의 뭉치 탓에 일방의 비정상적인 팽창은 연애라는 공간 자체를 확장하지 않는 이상 일방의 비정상적인 축소를 초래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결국 연애의 권태나 소멸은 화학적 결합의 실패가 아니라, 상대의 겸손하지 않은 일방적 팽창이 낳은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별하지 않으며, 행복을 지향할 수 있는 좋은 연애를 위해서 연인이 궁리할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개성과 당신의 개성이 서로를 억누르지 않고 연애라는 공간을 가득 채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리기 위한 질문을 우리는 좋은 연애를 지향하기 위하여 해야한다. 그리고 이 질문은 나의 경계가 어디인지, 당신의 경계가 어디인지 서로에게 설명하고 경계를 잘 지켜나갈 수 있는 지점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좋은 연애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내재한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건대 경계의 존재는 위험의 존재와 동치가 아니다. 경계의 존재는 연애의 존재 그 자체이다. 좋은 연애는 연인은 서로의 경계를 앎으로써 비로소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단순히 서로의 경계를 아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나의 경계가 밀려나서는 안되는 부분을 연애를 통해 확실하게 파악하고, 연인에게 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연애라는 공간 속에서 나는 쪼그라든 풍선 꼴을 면하지 못한다. 그 순간 좋은 연애가 발붙일 자리는 없고, 나아가 연애는 사라질지 모른다.


  나의 경계를 지키고 연인에게 이야기해야한다. 아울러 연인의 경계를 알았을 때 놀람을 감수하고, 경계를 찾기 위해 미지를 향해 나아갈 용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경계에 맞딱뜨리거든 겸손하게 그 경계를 인정해야한다. 거기서 좋은 연애와 사랑이 시작되며, 지속된다. 이것이 내 연애법 세번째이다.



경계를 두고 맞닿음. 넘치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며 경계를 유지라는 것. 경계를 넘는 순간 파괴적 본성이 드러날 수 있다. 쓰나미처럼.




연애법 셋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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