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mewhen Feb 01. 2017

화, 그토록 높은 나인가?

연애법 다섯째

    연애는 두 세계의 만남이다. 나와 당신의 연애는 불화와 조화 사이 어느 지점에 있다. 모든 관계의 위치도 마찬가지이지만 연애만큼 그 위치가 명백한 관계도 드물다. 연인은 너무나 가까이에 있어 불화와 조화 그 사이 어느 지점에 너무나 빨리 자신들의 관계를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곧 연애의 세계에서 인력(引力)의 작용영역이 좁기 때문에 두 세계의 안정적 결합(docking)과 격렬한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해서 관계가 위치하는 장소가 명백히 드러나는 것이다.


    연애는 전혀 다른 세계의 조우인 탓에 충돌을 피하기 어렵다. 각자 살아온 장소에서 학습한 감정의 해석 방식, 욕망과 믿음에 근거한 행위 방식이 달라서 일방이 특별할 것 없다고 생각하는 일에서 조차 충돌위험에 노출되기 쉬운 탓이다. 곧 상대에게 화내는 일이 귀애하는 일만큼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귀애하는 행위로써 연인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것처럼, 화내는 행위로써 연인에게 '특정한 금지'를 표현한다. 상대에게 화냄으로써 금지를 표현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불만을 알리는 동시에 특정 행위에 대한 포용 가능영역을 명확하게 획정하였음을 알린다. 화내는 행위는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다. 내용이 심각하고, 표현이 강해서 상대에게 깊이 각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내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해서 연애에서 선택할만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연애하는 동안 화내는 일만큼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한다. 화내는 행위는 때때로 효과적 의사소통을 위한 합리적 선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연애에 이롭지 못하기 때문에 회피하여야만 하는 선택지라고 할 수 있다. 연인에게 화내는 목적은 사랑이라고 이름붙인 상호존중(인정) 관계를 완성하는 데 있다.(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연애'라는 이름 아래에서 '화'를 논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화내는 행위에는 상호존중과 상충되는 상대에 대한 오만이 내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곧 연인에게 자신의 방식을 호소하고, 강제하려는 강한 오만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연애의 소통방식으로서의 화내는 행위에는 인정과 오만의 미묘한 어긋남이 존재하는 것이다.


    화내는 행위에 내재된 상대를 자신이 지향하는 방향으로 이끌려는 욕망에는 자기 판단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자리 잡는다. 이 신념은 '바로' 그를 사랑하는 상대로 선택하고, 상대와의 연애를 유지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는 또한 연인의 자유 통제하고, 상대에 대한 존중을 약화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나의 옳음이 인정받을 때에야 비로소 좋은 연애가 이루어진다는 오만에 찬 원인 말이다.



결국 화내는 행위는 의사소통에 효과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좋은 연애에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연인 중 하나의 판단과 선택이 명명백백 옳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연애에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연애는 서로 다른 세계의 조우로 시작하여, 각자의 세계가 담은 향기와 방식의 차이를 적절하게 조율해서 새로운 규범과 문화라는 균형점을 찾으며 완성되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세계가 조우했을 때, 안정을 위한 균형을 찾지 못한다면 두 세계의 공존은 불가능한 것처럼 연애도 균형을 잃으면 깨져버리게 된다.다만 연애의 균형점이란 불변하는 단 하나의 균형점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애의 장소에서 결정되는 유동적이고 다양한 균형점들이다. 그러므로 연애에서 중요한 것은 한 순간의 옳음보다 '균형들'을 찾으려고 애쓰는 노력, 곧 연인 사이의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소통(대화)은 나의 믿음에 대한 겸손과 상대의 믿음에 대한 존중으로부터 시작한다. 자기 신념에 대한 강한 확신은 상대의 신념에 대한 존중을 배제하기 때문에 상대의 의사에 귀기울이는 데 방해가 된다. 이미 자신이 옳은 상황에서 상대의 이야기는 소음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것이다. 결국 자기 신념에 차 상대에게 화를 낸다면 연애는 균형점을 찾지 못하고 위태롭게 된다. 그러므로 화내는 행위는 좋은 연애를 위해서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한다. 설령 자신이 화내는 이유가 명명백백하다고 하더라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결국, 화를 내기 전에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의 신념은 의심할 여지없이 참인가? 나는 나의 신념을 연인에게 관철시켜야만 행복한 존재인가? 곧 나는 나의 연인보다 높은 존재인가?



좋은 연애를 하고 싶다.





연애법 다섯째.



매거진의 이전글 Prolog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