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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n Sep 22. 2017

갑과 을, 너와 나의 연결방법

연애법 열아홉째

I. 시작하며 : 연애의 권력관계에 대한 통념적 생각


연애에 뿌리박힌 통념이 있다. 연인 사이에 '갑(甲)'과 '을(甲)'이 있다는 생각도 그 중 하나다. 연애에서 갑과 을이 있다는 생각에는 연애도 다른 관계와 마찬가지로 권력관계라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 틀림없이 연애도 다른 관계와 마찬가지로 권력관계이다. 연애에도 어떤 힘의 높낮이가 있고, 일상적으로 그 힘이 관계를 이끌어간다.


갑과 을의 통념적 연애 권력관계에서 작용한다고 믿는 권력은 관계적 권력(relational power)과 대체로 유사하다. 관계적 권력은 A가 본래라면 하지 않았을 일을 B로 인하여 A의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B의 의도대로 행동할 때 존재한다. 몇 시에 어디서 만나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할지부터, 누가 더 사랑하는가를 평가하기 까지 일방의 의도에 이끌려갈 때 연애에서 권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믿는다. 요컨대 연애의 권력관계란 설령 을이 의사에 반하더라도  갑이 원하는 대로  을이 행동하는 일련의 관계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통념적 연애 권력관계는 자기보존의 동기에 따라 일방이 권력을 선점하고, 독점하여 관계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꾸려나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즉 연애에서 갑이 되려는 마음에는 연애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이 결코 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자기보존의 욕망이 내포된 것처럼 보인다. 그 욕망은 구체적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연애를 이끌어가며 상대가 자신에게 온전히 맞춰줬으면 하는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많은 사람 사람들이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연애를 이끌어 가는 것이 자신이 사랑받는 연애, 좋은 연애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많은 부분이 허구적이고, 허위적이며, 폭력적이어서 좋은 연애를 위태롭게 한다.





II. 본론 : 통념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


연애에 대한 통념적 인식에는 크게 세 가지의 문제가 있다.


첫째, 연애에서 자기보존의 균형점이 정태적(static)이라는 생각의 허구성

둘째, 연애에서 상처받지 않아야한다는 생각의 허위성

셋째, 상대의 의사에 반하더라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해야한다는 생각의 폭력성




1) 연애에서 자기보존의 균형점이 정태적이라는 생각의 허구성


연애하며 상대에게 젖어들지만, 상대를 만나기 이전부터 오랫동안 만들어온 오롯한 모습의 나를 지키고 싶어 한다. 연인에게 존중받으며 나답게 살기를 원한다. 마치 연애의 세계에 연애 이전의 모습을 간직한 각자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지킬 수 있는 연애가 좋은 연애라는 믿음을 알게 모르게 품는 것 같다. 그리고 처음부터 자신의 세계가 안전한 균형점이 연애에서 흔들리지 않는 연애를 좋은 연애라고 믿는 것 같다.


“연애는 변화로 시작한다. 자기 세계에 새로운 사람을 끌어들이면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연애의 묘미는 나의 급작스런 변질이며, 인간적 성장이다.”

(소노 아야코 저, 오근영 역, 『남들처럼 결혼하지 않습니다』 , 서울 : 책읽는 고양이, 2017.)


연애의 시계와 동떨어져 변하지 않는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연애의 시작과 함께 자기 세계의 균형점은 연인이라는 새로운 변수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나아가 연애를 하며 관계가 깊어질수록 상대를 떼어놓고 자신이 의미를 찾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게 된다. 그럴수록 연애하기 이전의 바로 그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연애에서 얻으려는 어느 날의 바로 그 자신에 대한 보존은 연애의 시작과 동시에 깨지고, ‘자기보존’은 이미 달라진 것이 되는 것이다.


자기보존이 정태적이라는 생각이 허구적이더라도, 그 안에 담긴 자기보존에 연결된 존중에 대한 생각 덕분에 유용한 허구가 되기도 한다. 상대로부터 자신의 세계의 오랜 균형을 존중받으며 연애에서 자기보존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 연애가 좋은 연애라는 믿음을 통해서 연인에 대한 지나친 의존으로 피폐해지는 연애로부터 자신의 연애를 지킬 수 있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보존의 균형점이 정태적이란 생각은 연애에서만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을 얻을 기회를 앗아간다. 연인과 밀착된 관계를 지속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자신의 일면을 연인에게 발견당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찾고 연인에게 적응하며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만큼 연애에서 얻을 수 있는 값진 수확은 드물다. 이것은 과거에 머물러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연애의 진정한 수확을 얻으려면 의도적으로 과거의 자신과 작별을 고하고 변화를 꾀해야한다. 현실의 세계에서, 당위로 구축되어야 할 세계에서 모두 연애는 변화하며, 자기보존이란 개념 역시 변화의 맥락이지, 고착의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아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연애를 하면서 지키고 싶은 각자의 모습이 있다. 때로 그것은 역린(逆鱗)과 같은 것이어서 원래대로 있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부정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때조차 정태적인 자기보존 상태를 지키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상대가 매순간 자신의 균형점을 보호해주려는 마음이 핵심이다.


결국 자기보존에 대한 믿음은 유용할 수 있지만, ‘정태적이란 허구적 믿음’을 경계할 때에만 비로소 유용한 것이 된다. 연애가 변화를 필연적으로 함축하는 것처럼, 각자의 마음속에 좋은 연애를 생각하는 믿음, 자신의 균형과 항상성을 유지시킬 수 있는 연애에 대한 믿음도 동태적인 것이어야 한다. 연애의 역동성에 휩쓸리지 않고, 연애의 역동적 힘을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더더욱 그렇다.




2) 연애에서 상처받지 않아야한다는 생각의 허위성


연애를 하면서 상처받지 않고 싶은 생각은 좋은 연애를 나누고, 좋은 연애를 만들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자신의 감정이 상대 때문에 피폐해지지 않고, 상대가 주는 사랑으로 자신이 충만해지길 기대하는 마음은 연애를 시작하고 지속할 수 있는 힘이다. 때때로 우리는 상대의 존중이라는 보호막 아래에서 자아를 보호받는 연애라고 여기며, 좋은 연애를 찾아간다. 그리고 상대에게 상처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미루어 상대에게 상처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좋은 연애에 매우 가까이 서있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연애의 상처받지 않은 나를 관철시키려는 것은 상대를 사랑하지 않았거나, 혼자서 연애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모난 부분을 이미 가지고서 연애를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결코 모나지 않은 부분조차 상대에 따라 모난 부분이 되어 상대를 향해 거친 결을 세우기도 한다. 연애는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감정의 거리를 좁히는 일인 탓에 연인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접근하게 되고, 각자가 지닌 에고의 충돌 위험은 틀림없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연애라는 존재가 서로 밀착되는 관계로 서로의 존재를 부딪치게 되면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연애를 하면 상대의 모난 부분에 자신의 살결이 쓸리는 일을 피하기 어렵고, 내 모난 부분이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도 피하기도 어렵다. 연애를 하면서 아프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전혀 쓰리고 아플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상처를 보듬어주는 상대의 보살핌 덕분에 쓰리고 아픈 것을 금세 잊기 때문에 쓰리고 아프지 않다고 느낄 뿐이다.


그래서 연애에서 상처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연애에서 결코 상처받지 않으려는 생각은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교감하려는 시도를 어렵게 만들게 만들고, 상처에 휩쓸려 자칫 나를 보듬어주는 상대의 살뜰한 애정을 간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상대가 자신의 세계를 침범하고, 오랫동안 지켜온 평온을 깨고 혼란을 던지며, 침범이 만든 혼란이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가 모두 연애의 가친판단에 부정적인 근거로 작용한다면, 자신을 성장시킬 연애의 기회는 쉽사리 찾아올 수 없다. 요컨대 연애에서 상처받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은 연애의 진정한 시작과 성장을 더디게 만든다.


따라서 연애에서 상처받지 않아야한다는 참되지 않은 생각으로부터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상처를 주고받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큰 상처를 주지 않을 방법, 상처가 덧나지 않게 치유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처받을 거란 생각에 주저하는 생각을 용기로써 떨쳐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연애는 시작되지도, 연애를 하기로 해도 빈 껍데기만 남은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상대의 의지에 반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야 한다는 생각의 폭력성


모든 행동에는 그 행동을 그렇게 한 연유, 즉 의도가 있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연애는 상대와 연애라는 방식의 관계맺음으로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그 무엇 때문에 성립한다. 그리고 연애는 그 무엇의 획득, 의도의 실현을 목적으로 계속된다.


모든 방법이 가능하지만, 어떤 방법은 좋은 연애를 망치곤 한다. 그러므로 목적을 어떤 방식으로라도 실현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연애라는 방식에 걸맞게 연애해야한다. 연애를 하는 저마다의 방식이 있지만, 좋은 연애의 전제는 서로가 동등한 존재라는 합의된 믿음과 믿음에 기초한 동등한 존재에게 걸맞은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명명백백하게 온당하더라도, 상대가 온당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둘 사이에서 그것은 온당한 것이 되지 못한다. 온당함을 부정하면 안 된다는 강제에 가까운 자기주장이 아니라, 상대를 설득해 수긍할 수 있도록 만든 다음에야 연애 관계에서는 진정으로 온당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이해를 위한 과정이 생략된 과정은 결과의 온당함 대신에 과정의 부당함에 대한 기억을 상대에게 깊이 남긴다. 즉 그는 옳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기억 말이다. 그러므로 상대의 의지에 반하여 좋은 결과를 얻은 것처럼 보여도, 사실 좋은 연애의 일면을 망가뜨린 것이다.


우리는 상대가 너무 옳고, 너무나 바른 것으로부터도 상처받는다. 자신의 부족하고 미숙한 모습이 상대에 비춰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옳고, 바른 상대의 곁에 머물기 어렵다고도 느낀다. 자신의 온당치 않음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고치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얻기 전에 상대라는 존재 탓에 급하게 서두르며 부담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연애하며 기억하는 상대의 모습은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주고, 나의 생각과 감정에 귀 기울이는 태도와 행동이지,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상대의 의지에 반하더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믿음은 잠재적으로 폭력성을 내포한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혐오스러운 자극을 종국적으로 고의로 유발하는 행동을 선택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의 뜻대로 행동할 때 ‘사랑한다’고 믿는 것 또한 잠재적으로 폭력적이다. 전혜린의 말처럼 사랑은 두 영혼 사이의 지속적인 대화여야 하는 것이지, 내 의지의 관철은 아닌 것이다. 그 생각을 품고 사랑을 가름한다면 두 영혼 사이의 대회는 단절될 것임이 틀림없다.


‘상대의 의지에 반하더라도’라는 생각을 마음에 품더라도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마음이 연애에서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관철시키는 방법에 따라 좋은 연애를 위해 기여하기도 한다. 즉 ‘상대의 의지에 반하더라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반하는 서로의 의사의 간극을 좁혀가는 과정을 통해서 합의된 의사를 만들 수 있다면 '상대의 의지에 반하더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생각은 연애에 유용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에는 연애를 망칠 수도 있다. 결국 서로의 합의된 이해를 만들어가려는 과정울 중요시 하는 생각이 통념적인 연애 권력관계에 대한 생각에 뿌리깊게 박힌 "상대의 의지에 반하더라도 내뜻대로"라는 생각을 통제하고 수정할 수 있도록 자리매김 해야 하는 것이다.





III. 맺으며


우리는 연애를 시작하고, 좋은 연애를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연애의 권력관계에 대한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탈피해야한다. 연애가 권력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허구적이다. 그러나 연애가 바로 갑과 을로 비유되는 권력관계로 짜인 관계라는 생각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 상대와 뜻과 감정을 나누는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존재를 부딪치며 상처입고, 상처 입은 자리에 새살이 돋아나며 내 영혼에 상처가 되었던 것들을 극복하면서 더 나은 자신, 더 나은 우리가 되는 것이야 말로 연애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관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연애에서 진정한 권력은 상대의 혐오를 자아내지 않고 상대의 에고와의 동질성을 끌어낼 때 존재한다는 생각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연애의 권력은 상대가 내 뜻대로 움직이고, 내가 상처받지 않게 상대가 내 세계를 침범하지 못하게 할 때 존재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이러한 생각이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일방이 이끄는 온당하고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연애에서 진정으로 실제적이며, 유용한 권력은 상대와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서 나와 상대, 그리고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끼며, 이 관계를 통하여 온당하고,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한병철, <권력이란 무엇인가>, 서울 : 문학과 지성사, 2016 참조)


우리는 연애를 시작하며 변화하는 세계에서 연애의 일상을 살게 된다. 연인은 나의 세계의 균형점을 바꾸는 중요한 변수로 나에게 스민 우리의 자기보존의 균형점을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는 변화를 체험하며 상대로부터 상처받고, 상처를 주며 연애에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찾으려는 여정을 시작하고 지속한다. 그 여정은 연인과의 대화의 연속이며, 많은 경우에 서로의 견해로 부딪치는 대화의 연속이다. 그래서 연애는 힘든 것인지 모르겠다. 변화하고, 아프고, 그리고 그것들이 연속되기 때문에.


이 힘든 과정에서 우리를 지키는 방법은 통념적으로 갑이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을은 갑의 행동과 태도를 오래도록 기억하며, 그것으로부터 그의 진면목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해야 한다. 연인에게 귀 기울이고, 연인의 감정 주파수에 자신의 주파수를 맞춰 자신과 연인 사이에서 동질성을 끌어내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그 노력을 통해 동질성을 끌어낼 수 있는 힘을 진정한 권력으로, 그 권력으로 짜인 권력관계를 연애에서 유용한 권력관계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나와 당신의 연애#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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