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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완 Jun 29. 2022

나는 승진하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할미대리로 남고 싶었는데

직장인이라면 원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기도 하고, 어쨌거나 하게 되는 ‘승진’. 연차가 쌓이고 능력이 충족되면 승진을 하게 된다. 승진을 하면 연봉이 늘어나니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그만큼 책임이 쌓이기도 하고, 점차 사측이 되기도 한다. 사측이 된다는게 나쁜 의미가 아니라 아무래도 직급이 올라가는만큼 좀 더 회사의 입장에서 일을 하고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좀 더 깊이 회사의 일들을 책임지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나는 승진하기 싫었다. 싫었다기 보다는 부담스럽다, 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점차 늘어나는 책임감과 부담감, 그리고 직급이 올라갈 수록 늘어나는 회의와 술자리 (지금에서 술자리가 더 늘어나다니, 정말 상상도 하기 싫었다) 들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회사 내에서 친해진 친구들도 모두 비슷한 성향인지라, 모두가 실무를 많이 해도 되니 할미대리로 영원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가장 먼저 과장으로 승진한 친구는 우리가 ‘이제 너는 사측이다’ 라며 놀림 반, 축하 반을 하자 과장 대신 ‘과자’라고 불러달라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과자도 과장이 되고, 할미 대리도 승진을 했다. 연봉은 내 기대만큼 안 높아진 것 같은데 회의와 책임감은 늘어났다. 일이 부담스럽고 하기 싫은 것과 별개로 나는 내가 맡은 일은 잘하고 싶었다. 마치 내 남자친구를 나는 욕해도 되지만 남이 욕하면 기분 나쁜 것처럼, 내가 이 일에 대해 어마어마한 단점들을 말하고 다녀도 남들이 내 일에 대해 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마케팅이라는 게 그렇다. 누군가는 크리에이티브한 일이라고 추켜세우지만, 누군가에게는 본질과 상관없는 포장지일 뿐이다. 결국 영화가 재밌어야지, 포스터 예고편이 뭐 중요한가 라는 말은 정말 수도 없이 들어봤다. 정확한 장점과 기능이 있는 제품과 달리 영화나 컨텐츠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재미있고 없고가 달라지다보니 각자 재밌다고 느끼는 포인트도 달라서 주요 포스터와 예고편은 늘 논쟁이었다.


이 포스터로 하면 나 홍보활동 아무것도 안한다고 해


팀장님 컨펌을 받고 수정하고 나면 제작사와 협의가 필요했다. 제작사 피디부터, 감독, 이사, 대표까지 의견을 주고 수정을 하고나면 또 우리 회사 대표님의 컨펌이 필요했고, 그 컨펌의 산을 넘으면 회장님 컨펌이 있었다. 그렇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수정된 시안이 최종 결정이다! 하고 끝인 줄 알고 배우에게 공유했는데, 배우가 싫다고 해서 모든게 다시 처음부터, 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앞에서 말한것처럼 나보다 수십년 영화를 한 라떼 배우들이 그렇고, 때로는 잘나가는 젊은 배우들도 그랬다) 그건 내가 대리여도, 과장이어도, 팀장이어도 반복되는 일이었고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들이었다.


내가 왜 배우의 의견과 컨펌까지 받아야하는지 회사에 항의한 적도 있었지만 다음 계약이 걸려있어서, 홍보활동을 안한다고 하니까, 혹은 직접 전화해서 난리를 치니까. 안할 수가 없었다. 이런식으로 수정에 치이고 나면 대체 내가 한 건 뭔지, 이 마케팅을 내가 했다고 할 수 있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어차피 대행사에서 다 해주니까
마케팅팀은 별로 하는 거 없지 않아?
한명이면 충분하지 않나?

일의 특성 상 정말 많은 대행사와 일하고, 많은 아이디어를 받는다. 나 혼자 모든 걸 해결할 수는없으니까. 새로 회사를 차리시는 분이 마케팅팀을 꾸려야하는 데 나에게 대행사 출신을 추천해달라며 말했다. 마케팅 팀으로 일을 하고 있는 나에게 마케팅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하면서 일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다니. 그도 잘못된 걸 알았는지 금새 ‘니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하고 덧붙이긴 했으나 이미 내 마음은 상처받은 후였다. 당연히 나는 그에게 아무도 소개해주지 않았다.



승진을 할 수록 일과 회사에 대한 회의감이 더 커졌다. 내가 직급이 올라가도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것만 오히려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다 코로나까지 터지면서 더욱 더 심한 상실감이 몰려왔다. 영화가 개봉을 하지 않으니 모든 일이 꽉 막혔다. 일이 없으면 좋은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일을 안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계속 수정만 진행했다. 이렇게 수정했다가 저렇게 수정했다. 기약없는 개봉을 기다리며.



장기간 코로나가 이어지며 회사에서도 당장 필요한 인원이 아닌 마케팅 인원부터 줄였다. 대행사가 다 해주니 괜찮다고 생각한 걸까. 하지만 그 대행사들도 개봉 정산을 받지 못해 문을 닫고 사라지고 있었고, 이 일을 계속 버티면서 하겠다고 남아있는 게 맞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코로나에 익숙해져가고, 기약없는 개봉일정 속에서 다시 희망을 걸어보고 개봉 준비를 하던 21년 봄날, 포스터와 예고편 시안을 완성하고 대표님 컨펌까지 받고 모두가 잘 나왔다며 좋아했던 시안을 배우의 한마디로 모두 다시 다 엎은 날, 나는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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