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청망청 내인생 02. 원래는 술을 싫어했는데요,

발포주와 함께 시작된 나의 술 인생

by 재완

23살 이후 나를 안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않지만 나는 원래 술을 싫어했다.



내가 처음 제대로 술을 접한 건 대학생때였는데 하필이면 내가 다닌 학교가 술과 삼배주 문화로 유명한 학교였다. 입학하자마자 신입생 환영회랍시고 목욕탕 대야만한 양푼이에 막걸리를 쏟아붓고, 그 옆에는 토할 수 있도록 대형 파란색 쓰레기통까지 가져다놓고 마시라고 강요하는 그런 학교. 학과 신입생 환영회에서 1차로 겪고 동아리에서 더 진하게 겪었다.


나는 대학 방송국 활동을 했었는데 이것도 언론사라고, 회식과 술 강요가 정말 많았다. 꼭 안좋은 것만 먼저 배워서는 ... 지금 생각하면 고작 23살, 24살들이 선배라고 와서는 회식하자 하고, 새벽까지 형제집, 이모집, 고모집을 전전하며 술 한잔에 방송과 인생과 군기를 말했던 촌스럽고 부끄러운 날들이었다.


나름 고등학교때까지 성실한 학생이었던지라 대학 전까지 술에 흥미가 없고 마셔본 적도 없었는데 들어가자마자 접한 술 문화가 이런 것들이다보니 술이 좋아질 수가 없었다. 특히나 소주는 알콜향만 나고 맛도 없고 왜 마시는지 모르겠는데 선배들이 부어라 마셔라 하니 더 싫었다. 정말 너무 마시기 싫어서 선배가 내게 술을 따라주는 소주 병 입구를 그대로 손가락으로 틀어막은 적도 있다. 그렇게나 술을 싫어하고 맥주 한잔도 제대로 못 마시던 나인데, 일본 어학 연수가 나와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22살 나는 일본으로 1년간 어학연수를 떠났다. 내가 갔던 곳은 시골에 있는 대학교였는데, 대학교가 설립되면서 시로 승격된 곳이라, 주변에는 논밭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내 기숙사 방 바로 뒤에는 작은 저수지가 있었고, 주변 나무 위에서는 늘 까마귀가 울고 있었다. 캠퍼스를 나오면 바로 넓고 푸른 논밭이 펼쳐졌고, 자전거를 타고 한시간쯤 달리면 유일한 쇼핑센터가 나왔다.


주변에는 논밭 밖에 없는 시골의 대학교. 그 곳에서 나는 술을 배우고 잘 마실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말았다. 첫째, 함께 어학 연수를 간 선후배들이 나를 빼고 모두 술을 좋아하고 잘 마셨다. 둘째, 일본 대학교의 기숙사는 저렴한 대신 욕실이 없는 방들이 있었는데, 나는 화장실과 욕실이 딸린 큰 방을 배정받았다. 셋째,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타지에서 서로 의지해서였기도 했지만 함께 어학연수를 갔던 선후배들과 사이가 꽤 좋았다. 우리는 화장실이 있는 내 방에 자주 모여서 술을 마셨고, 나중에는 한국인 뿐만 아니라 홍콩, 미국, 프랑스인까지 와서 어울리며 놀았다. 내 방에서 마시다보니 나도 늘 같이 마실 수 밖에 없었고 강요하는 술자리가 아닌 친해지며 자연스럽게 마시는 술자리는 재밌고 즐거웠다. 이래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구나, 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또 술을 마시는 건 이런 맛이구나, 를 깨닫게 해준 건 바로 편의점 아르바이트였다. 일본 편의점에는 맥주 종류가 정말 많다. 특히 맥아 함량이 낮은 발포주 종류가 많은데, 발포주는 한 캔에 180엔 정도로 워낙 싸다보니 가난한 유학생에게는 너무 좋은 술이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밤 10시면 나는 자연스럽게 편의점 닭다리를 하나 튀기고, 종이봉투에 싼 후 냉장고에서 발포주를 한캔 꺼내와 내 스스로 찍고 결제를 한 다음 퇴근했다. 그리고 일본 CF에 자주 나오는 장면처럼, 퇴근 후 작은 욕조에서 씻고 나온 후 머리에 수건을 걸친 채로 발포주 한잔과 조금 식은 닭다리를 바로 뜯어먹었다. 발포주는 우리나라 카스 하이트같이 가볍고 탄산감 있는 맛이라, 샤워 후에 마시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술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일본인 친구들에게 한국인의 술 실력을 보여주겠다며 마시고, 교환학생들이 모여있다보니 한명 한명 떠날때마다 마시고, 편의점일이 끝난 후에 마시고, 축제여서 마시고, 일본이니까 마셨다. 술을 잔뜩 마시고 나서도 자전거로 한시간을 달려 노래방도 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쯤, 이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왠만한 발포주는 다 마셔봤다, 할 때쯤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1년 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소주 병 입구를 손가락으로 막으며 거절하던 싸가지 신입생에서 근 1년간 거의 매일 술을 마시며 단련해왔다고 믿는, 어줍잖은 술부심이 가득찬 복학생이 되어 돌아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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