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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아옹 Dec 08. 2022

엄마도 삼남매는 처음이라

'행복'에 관하여



어리석은 사람은 행복을 멀리서 찾고
현명한 자는 자신의 발치에서 행복을 키워간다
제임스 오펜하임



첫째 아이 임신 때도 감기처럼 열이 나고 오한이 있었다.

나름 두 번째라고 흐린 두 줄이었지만 생리 날짜에 생리가 없고 감기 증상이 있어 둘째 아이가 왔다고 확신하며 병원을 찾았다.

"아직 아기집이 안 보여요. 자궁외 임신 일수도 있고요"

의사들은 확실하지 않으면 항상 극단적인 이야기부터 한다는 건 이미 당해 봐서 알고 있었지만

눈에서 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남편은 첫째 아이 임신 때 매일 먹던 대창을 사주겠다며 나를 꼬셔 '연타발'로 끌고 갔다.

첫 임신 때 그렇게 살살 녹던 양대창은 무슨 고무를 씹는 듯했다.


2주 후에 다시 오라고 했지만 임테기는 할수록 점점 찐해졌고, 자궁외 임신이면 어쩌지라는 걱정에 일주일도 되지 않아 병원을 다시 찾았다.

초조하게 앉아있는데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자궁에 태아 2명이 있는 그림의 다태아 지원 포스터.

다태아라는 용어를 처음 본 나는 '아 쌍둥이'라고 작게 혼잣말을 했다.

함께 보던 신랑이 우스갯소리로 "임테기 찐한 게 우리도 혹시 쌍둥이?"

"확!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라"

나도 모르게 진심 화를 냈다.

사실 시어머니 친가 쪽이 대대로 쌍둥이 집안이다.

그래서 첫 임신 때에는 내심 기대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첫째가 아니라 둘째다. 두 번째 임신 때 쌍둥이 농담은 우스갯소리로 할 얘기가 아니다.


"아기집 보이네요. 심장소리도 들리고 아주 잘 크고 있네요."

"와 감사합니다"

"! 잠깐만요, 하나 더 있는데요"

순간 나는 남편을 째려봤고, 남편은 허공을 바라봤다.






그렇게 우린 삼남매의 부모가 될 준비를 해야 했다.


입덧하며 한 달, 경부 길이가 짧아져 석 달. 임신기간의 반은 누워 지내야 했다.

글로 배운 쌍둥이 임신은 이벤트가 많다고 했지만 '나는 괜찮을 거야'라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에 로켓 발사 모양의 배를 자랑삼아 여기저기 잘도 돌아다녔다.

임신 24주 차 정기검진 전날 밤에 열이 났다.

임신 중에 약을 먹으면 안 된다는 무지한 생각에 밤새도록 버티고 정기검진을 갔다.

열이 얼마나 산모, 태아에게 위험한지도 모르고.

정기검진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집에서 버티다 녀석들을 만났을 거라는 아찔함에 눈앞이 캄캄했다.


그날 이후 나는 고위험 산모로 분류되어 병원밥을 먹기 시작했다.

자궁수축 억제제인 마그네슘을 달고 사랑하는 첫째 아이와 생이별을 했다.

35주 6일,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나온 성격 급한 녀석들은 미숙아로 이름 붙여져 태어나자마자 신생아 중환자실로 직행했다.

병원밥을 먹으면서 빠질대로 빠진 근육들은 날 휠체어로 인도했고, 내 배에서 쏙 빠진 녀석들만 놓고 휠체어를 타고 쓸쓸히 퇴원했다.

3개월 만에 마셔 본 바깥공기는 신선했지만 마음은 차갑고 쓸쓸했다.

일주일 후 다행히 건강하게 퇴원 한 녀석들과 산후조리원에서 2주간 꿈같은 육아휴직을 누렸다.

그리고 바로 삼남매 엄마가 되어 집으로 복직했다.



각오는 했지만 삼남매 육아는 첫날부터 그 이상을 보여줬다.

쌍둥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미리 예약했던 쌍둥이 전문 산후도우미 업체에서 사정이 생겨 1(경력이 많은 배테랑) 이모님이 올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어렵게 대신 오신 분은 분유도 탈 줄 모르는 나이 많은 어르신이었다.

'오 신이시여'

첫째 아이와 쌍둥이가 있는데 거기다 어르신까지 내가 케어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것도 돈을 주면서.

결국 여기저기 업체에 연락을 했지만 5살 남자아이와 쌍둥이를 돌봐주겠다는 천사 같은 이모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추운 겨울 우리 가족은 집이라는 동굴 속에서 사람이 되기 위한 곰과 호랑이처럼 갇혀 지냈다.




다섯 식구에 익숙해질 때쯤 처음으로 쌍둥이의 50일 촬영을 위해 외출을 감행했다. 

집 앞 10분 거리 촬영장에 가기 위해 우리는 1시간이 넘는 준비시간을 가져야 했지만, 누구의 도움도 없이 용감하게 도전을 했다.

30분 정도의 짧은 촬영이었지만 무한대의 시간 속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헥헥거리고 있었다.

어쨌든 성공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래도 나름 선방했다고 "이 정도면 뭐 발로도 키우겠네"라며 으쓱했다.

한겨울 머리에서는 땀이 줄줄 났지만 우리 부부는 처음으로 상장을 받아와 칭찬받는 아이처럼 서로를 칭찬하며 깔깔 웃었다.

주차장에 무사히 도착한 우리는 집에 가서 성공적인 다섯 식구 첫 외출을 자축하자며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열렸습니다" 소리와 함께 우리는 그대로 얼음되어 버렸다.


'현관문도 활짝 열려 있습니다'


남편의 오른손은 첫째 아이 손을 잡고, 남편의 왼손은 막둥이가 앉아있는 바구니형 카시트를 잡고 있었다.
내 오른손과 왼손은 이쁜 딸내미를 꼭 껴안고 있었다.

각자의 손들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 중이었기에 차마 현관문을 닫을 손이 없었냐뭐라 할 수는 없었다.


행복한 육아가 시작되었다는 신호탄 이리. 


"행복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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