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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입니다

어제보다 0.3° 높아요

by 수민

늘 생각하지만 하루는 길고, 일주일은 짧습니다. 가끔 아주 긴 일주일을 보낼 때도 있는데 보통 그런 시기에는 한 달이 빠르게 지나가지요. 이번 주는 조금 느리지만 나름 버틸만했던 주간이었습니다. 삶이 흘러가는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는데 작년 한 해는 유달리 하루하루가 빠르게 느껴지는 해였네요.


입사한 지 2년 하고도 반을 넘어가는 기점에 서 있습니다. 그러니 2년 하고도 반 전의 저는 다른 곳에 있었단 뜻이겠죠. 겨울에서 여름으로 건너오는 8개월의 시간 동안 저는 강원도에서 살았습니다. 충청도에서 수 해, 경기도에서 몇 해, 서울에서 한두 해를 살다 강원도로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가끔 그때 내가 강원도로 가지 않았다면 어떤 방향으로 내 삶이 이어지게 되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화요일에 좋은 소식이 있었습니다. 나라의 좋은 소식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좋은 소식 하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원고도 되어 보았고 피고도 되어 보았습니다. 20대에 법원을 들락날락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요.


난생처음 고용노동부를 가 보고, 법률구조공단을 가 보고, 소송을 걸어보고, 피의자로 조사도 받아보고, 증인으로 선서도 해 보고. 판결문을 받기 위해서는 수입인지를 사고, 선불 우표를 붙인 봉투를 넣어 보내야 한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법원에서 언제 서류가 날아올지 모르니 받을 주소를 집이 아니라 회사로 해 놓아야 번거롭지 않다는 것도요. 나의 사건검색으로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나 종종 확인하면서 재판날을 달력에 적어놓기도 했습니다.


네, 임금 체불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한 임금 체불이 아니라 권력 다툼이 얽힌 임금 체불이었습니다. 누군가는 내가 직원이 맞다고 하고, 누군가는 내가 직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8개월간 일을 하고 꼬박꼬박 월급을 받아왔는데 하루아침에 고용된 적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새로운 직원이라고 사무실에 왔습니다. 내가 직원이 아니라고 하신 분은 내게 인수인계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중간에서 붕 뜬 채로 양쪽에서 해 달라는 것을 해 주었고, 때로는 서로 그 일을 해 주지 말라고 요청하는 것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기도 했습니다. 얼마 안 가 윗분들의 갈등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고, 사무실 비밀번호가 바뀌면서 아예 출근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력서를 넣은 회사에서 연락이 와 면접을 봤고 빠르게 이직할 수 있었습니다. 민사와 형사를 걸어놓고 떠나는 것이 영 깔끔하지 않았지만, 일단 그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기쁘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강원도를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작 백몇 만 원이 걸린 재판이 이렇게까지 지지부진 길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고용노동부에 임금 체불 신고를 하면 법률구조공단으로 가서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습니다. 형사 재판은 당시의 상사분과 함께 신청하고 민사 재판은 개인적으로 따로 신청해야 했습니다. 반차와 연차를 써 가며 법원과 법률구조공단을 오갔고 나름 순탄하게 일이 진행되는 것 같았습니다.


회사에서 일하던 중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경찰서라고 했습니다. 출석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셔서 일단 알았다고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재판은 법률구조공단을 통해서 하고 있고, 법원에서 진행할 텐데 왜 경찰서에서 전화를 했을까. 순간 보이스피싱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여기저기 알아보며 왜 이런 전화가 왔는지 알아보려 했습니다. 걱정이 되셨는지 아빠가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해 보셨고, 제가 피의자로 고소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 왜 고소를 했는지는 묻지 않고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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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면허증 찾으러 동네 경찰서를 가 본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출입증을 신청해서 목에 걸고 혼자 들어가야만 하는 경찰서는 처음이었습니다. 약속 시간에 맞춰 기다리고 계시던 경찰관 분과 만나게 되었고 흔한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보던 조사실에 들어갔습니다. 책상 하나와 의자 두세 개가 겨우 들어가는 좁은 공간이었습니다. 가지고 온 자료를 드리고 묻는 질문에 대답하는데 내가 잘못한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갈비뼈가 죄어오는 감정은 막아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이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압박감이 컸습니다. 자갈이 구르는 듯한 타자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면서 내 뱃속에도 자갈이 쌓이는 것 같았습니다. 조사는 두 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얼추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짐을 정리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혹시 다음에 제가 여길 또 올 일이 있을까요? 경찰관 분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러진 않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가방을 챙겨서 나가는데 손이 좀 떨렸던 것 같습니다. 밖에서 기다리던 부모님은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고 걱정스러워하셨습니다. 딸이 혼자 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러 간다고 하니 마찬가지로 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근심이 크셨을 겁니다.


그 뒤로는 한참 연락이 없다가 지하철에서 한 번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쪽에서 대면 조사를 하고 싶다고 요청했는데 응하겠냐는 물음이었습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습니다. 혹시 가지 않았을 때 불이익이 있냐고 물었더니 그런 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가지 않겠다고 의사를 전달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심장이 벌렁거려서 머리가 다 어지러웠습니다. 사직하겠다고 연락을 했을 때도 끊임없이 말을 겹치게 하면서 내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던 사람이 이제와 대면 조사를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요. 그것도 업무 방해와 허위 사실 유포로 고소를 하셨으면서요. 다행히 그 일 뒤로 경찰서에서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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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재판에서 증인을 한 번 섰습니다.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의 그분도 만났습니다. 증인석에서 선서를 하고 증언을 하는 중간마다 옆에서 헛웃음을 짓는 듯한 반응이 느껴졌습니다. 일대일로 이야기를 나눌 일은 없었습니다. 증인비는 꽤 쏠쏠했습니다. 소중한 연차를 내고 기차까지 타서 법원을 가야 했기에 조금 우울하던 찰나였는데 충분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형사는 승소했고, 민사도 승소했습니다. 그리고 곧장 항소가 들어왔습니다. 두 건 모두. 재판은 끝을 모르고 길어졌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형사에서 항소가 기각되었습니다. 형사 결과가 나온 뒤에 민사를 진행하기로 결정되었던 터라 드디어 민사도 진행이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화요일. 드디어 민사 역시 항소 기각이 결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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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이런 연락이 왔네요. 만약 상고를 하지 않는다면 무사히 돈을 받을 수 있겠지만, 이미 형사를 상고한 분이기 때문에 안심할 순 없을 듯합니다.


단순히 돈의 문제였다면 이렇게까지 올 일은 아니었을 겁니다. 애초에 월급은 그분의 통장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돈을 줘야 하는 것이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임금 지급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지. 기억을 되짚어 그분의 말과 행동을 떠올려보면 자신의 뜻대로 이 사건을 마무리 짓는 것이 본인의 신념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것이 정말 선하고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행보가 가능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왜 제가 그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일했던 상사분에게 듣기로는 그쪽 민사는 상고를 포기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그만 제 쪽도 포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내가 완전무결하고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무조건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타인의 말을 듣지 않을 때. 단순히 선악으로 가를 수 없는 확고한 '나'의 기준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버릴 때. 그리고 그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순간 말입니다. 살다 보면 가끔 그렇게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침잠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합니다. 그들은 오만한 사이비처럼 자기 자신을 교주 삼고, 다시 자기 자신을 신도 삼아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겠다는 목표가 하나 생겼으니 교훈 하나는 얻은 셈이네요. 어쨌든 좋은 금요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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