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대회.

by kasory

학년 체육대회가 있는 날이었다. 종목은 8자 줄넘기와 발야구. 그동안 아이들과 체육을 해보니 개인 역량은 무척 뛰어난데 잘하는 만큼 승부욕도 세서 원하는 대로 경기가 풀리지 않으면 우선 화부터 내고 보는 경우가 많았다. 자제시키려 애써봤지만 이기고픈 마음 발동하면 배려고 뭐고 없었다. 못하는 애에겐 바로 빠지라 했고 가장 빛날 수 있는 자리에 서로 서 있으려 욕심 부렸다. 그러니 팀전에서 모래알 같이 흩어질 수밖에.



8자 줄넘기는 그나마 나았다. 문제는 발야구였는데 게임 몇 번 하고 났더니 울고 싸우고 감정 상하고 욕하고 화를 주체하지 못해 부들부들 떠는 아이들도 있었다. 고슴도치 스물두 마리가 한껏 가시를 세우고 서로를 마구 찔러댔다. 나는 이런 경우 바로 개입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는 편인데, 오늘은 더 지켜보다간 뭔 일 날 것 같았다.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런 진행은 의미 없다며 다 그만 두고 교실로 가자 했다. 안 해도 된다고. 여기서 지금 유쾌상쾌통쾌하게 게임 즐기는 사람 있냐고 했더니 한 명도 손들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으니 전략 수정이 필요하다길래 기회를 줬다. 그리고 이왕 하는 거 즐겨보자며 다독였지만 이미 바람 빠진 풍선처럼 무기력해진 아이들을 데리고 뭘 할까 싶어 나마저도 바람이 빠졌다.



안되겠다! 이렇게 교실로 돌아가면 큰일이다, 싶어 체육창고에서 응원봉을 찾았다. 응원봉은 없었지만 비슷한 건 있길래 꺼내들고는 아이들에게 막 들이댔다. 애들한테 쑥스럽고 낯 부끄러워서 절대 우스운 모습 못 보이는 사람인데 갑자기 자기네들을 응원한다며 덩실덩실 들이대니 아이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최선만 다하자고, 서로 상처만 주는 일은 피하자고 덩실덩실 거렸더니 아이들 얼굴이 조금 나아졌다. 역시 으른이 우습게 망가져야 집안이 화목한 것인가.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내 응원이 다른 반 애들 사기저하 시킬까봐 웬만하면 그저 지켜보는 편인데 오늘은 우선 내가 급했다. 뭐라도 해야 했다. 아이들이 화낼 때마다 진정시키고 괜찮다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몇 명이 나를 따라 응원하기 시작했고 나중엔 내가 하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사기를 북돋아주며 으쌰으쌰 했다.


안정된 분위기에서 이기기 시작하니 경기에 재미붙인 아이들


텐션 바짝 올려주고 나는 병든 닭처럼 고꾸라져 걸걸해진 목과 함께 구석에서 아이들을 지켜봤다. 확실히 전과는 달라진 모습이었고 결국은 좋은 결과로 경기를 마쳤다. 교실로 돌아와 폭풍칭찬하며 오늘의 경험을 잊지 말고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잘 대처해 보자고, 너희들은 이미 좋은 에너지를 차고 넘치게 충분히 가지고 있는데 초반에는 제대로 못 썼을 뿐이라며 오늘의 승리를 이끈 건 백프로 너희들 힘이라고, 너무 고생했다며 다독였다.



마무리의 의미로 오늘 경기에 대한 소감을 쓰게 했더니 선생님 응원이 도움이 됐다, 처음엔 망하는 줄 알았는데 협동하니 잘 되더라, 우리 선생님이 5학년 쌤들 중 제일 열심히 응원하더라, 선생님 말 듣고 마음 다잡으니 계속 이기더라 등등 반성과 기쁨이 녹아있는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어제 한 모임에서 '선경험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얘기했었는데 부정적인 것들을 지적하고 끝내는 것보다 부정적 요소를 해결할 대안을 찾고 바로 적용하여 성공경험을 쌓게 하는 과정까지 가능하도록 끌어주는 것이 참 필요하단 생각을 다시 한 번 했다.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근육이 생겼길. 그 근육이 다음 번엔 좀 덜 실수하고 더 쉽게 나아갈 동력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2019.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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