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게 왜 힘드냐'란 질문을 들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에 방점을 두었기에 힘들어도 애쓰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의미를 질문에 담았다.
질문받은 상대는 모두의 의견을 조율하려면 굉장히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걸 지속적으로 해나가려면 힘든 작업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노력은 의미 있겠지만 결국 지속성이 없다면 그 의미도 오래갈 수 없다는 '한계'에 방점을 둔 답변이었다.
지속적으로 가져갈 수 있고 힘들어도 노력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일이라면 질문자에게 한계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를 위해 나아갈 그의 앞으로를 응원해주고 싶었다.
다만 나는 궁금했다. 왜,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지. 그 애씀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되어 무얼 얻고 싶은지. 한때는 나도 그런 마음을 품은 적이 있었으니까. 아니 사실 지금도 그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하니까.
'좋은'의 의미는 무척 상대적이라 '모두에게 좋은 것'이란 합의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모두가 동의하는 좋음이 있다면 그건 각자에게 최고로 좋은 것이라기보다는 모두를 고려해 개인의 크고 작은 포기를 수반한 최선의 선택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 포기의 영역도 최선을 다해 조율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개인적으로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두에게 좋은 쪽으로 어떻게든 해결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행복이라 여겼던 때는 남의 눈치를 참 많이도 봤다. 내 의견은 드러낼 생각도 없이 그저 상대가 원하는 바를 열심히 듣고 그것이 맞다 여기면 우선 수용하고 봤다. '그래, 니 말이 맞지.'
하지만 모두의 말이 맞아서는 절대로 결론을 낼 수 없었다. 내 안에 존재하는 각자의 이야기들이 늘 둥둥 떠다녔다. 나는 그 짐이 참 무거웠다. 내려놓고 싶으면서도 좋은 사람이 되고픈 욕심을 못 버려 오랫동안 무거운 채로 살았다.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나는 (너에게는) 좋은 사람이었겠지만 정작 나에게는 '나쁜' 사람일 때가 많았다. 나를 지키며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건 불가능했다. 결국 하나는 내려놔야 했고 나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자신을 좀 더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질문자에게 말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면 너무 좋겠지만, 그건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일을 바라는 과욕 같아요. 그 욕심에 갇히면 내가 너무 힘들더라고요. 대신 저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보다 예측 가능한 사람이 되는 게 더 현실적인 대안이라 생각해요. 내 원리원칙을 명확히 세우고 상대에게 지속적으로 알리는 것.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든 상대가 저 사람이 중시하는 바를 인지하게 만드는 것. 물론 그 원리원칙은 이해 가능한 것이어야겠지만, 좋은 사람보다는 일관된 태도를 보여주며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약간 냉한 관계가 저는 오히려 나은 것 같아요. 모든 관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아이들도 어른들도 다 똑같은 사람이라 차별받는 것에 극도로 예민하다. 관계에서의 차별은 사실 어마어마하게 큰 문제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그래서 이걸 드러내 놓고 말하기도 뭐하고 안 드러내자니 마음이 자꾸 뾰족해지는, 미묘하고 사람 치사해지는 이야기들이 관계를 더 힘들게 한다. 아마 좋은 사람들은 주변에 사람이 많으니 더더욱 그런 시선에 포착될 거리들이 많을 것이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이 결국 누구에게도 제대로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할 수 있다는, 정작 진짜 의미 있게 대해야 할 상대에게는 힘을 덜 쏟게 되는 바보 같은 일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나는 종종 그 두려움이 무척 크게 다가올 때가 있다.
요즘은 선택에 대한 고민이 많다. 선택과 집중을 잘하며 살고 싶은데 선택도 집중도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잘하는 건지 늘 새롭고 어렵다. 최근에도 몇 개의 선택을 하면서, 좋은 사람이라는 거대한 욕심보다는 현재의 내 선택에 끝까지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장 덜 두렵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