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이후로 연애와 짝사랑을 번갈아 하며 누굴 좋아하는 일을 쉬진 않고 살았다. 그리고 하나의 사랑이 끝날 때마다 생각했다. 내가 또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까. 다신 사랑 따윈 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마음을 품어본 적은 없었다. 난 그런 강한 의지의 소유자가 못 됐고 그러기엔 내 안에 사랑이 많아 마르지가 않았다. 오히려 두려웠던 건 다시 사랑을 하지 못할까봐였다. 이렇게 또 마음을 쏟아낼 상대가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만큼 다 써 버렸으니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에 늘 최선을 다했다. 뭐 그리 열심히 좋아하냐고 할 만큼. 사랑 비수기일 때 열심히 저축해놓은 에너지는 상대가 생기면 전액 인출되어 쓰였다. 그렇다고 상대에게 엄청나게 저돌적인 행동으로 다가간 것도 아니었다. 쫄보는 그저 하루종일 그 마음을 품고 다니는 일만으로도 점점 버거운 삶이 되었다. 온몸의 촉수가 그를 향해서만 반응하는 것 같았다. 자주 움찔움찔했고 상대의 사소한 언행에도 일희일비하며 의미를 부여했다. 그때만큼 한국어를 열심히 분석한 적도 없었다. 이 단어는 어떤 의미로 쓰인 것일까요? 이 말을 할 때 화자의 비언어적 행동과 반언어적 표현을 분석해 봅시다. 밑줄 치고 돼지꼬리 땡땡!
출제자만 아는 정답을 도무지 알 길이 없어 때마다 친구들을 소환했고 괴롭혔다. "야, 이게 무슨 의미일까? 왜 그런 말 했을까?" 그들의 반응은 성향에 따라 각양각색이었다. 별 의미 없다, 긍정적 의미로 해석해도 될 것 같다, 모르겠다 등등. 스카이캐슬 김주영 쓰앵님처럼 백프로 S대 보내줄 수 있는 사랑의 코디가 있다면 전적으로 믿고 맡겨버릴 만큼 절박했던 나는 친구들의 말에도 일희일비하며 답정너처럼 내가 원하는 답들에 좀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온 마음을 쏟는 게 사랑이라 생각했다. 진심을 다해내는 것, 그것이 사랑의 기본이라 여겼다. 하지만 삶에서 마음 쓸 곳은 사랑 말고도 많았다. 일상의 우선순위에 사랑이 1번이 되어서는 흔들림 없이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그 사랑이 견고하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상대의 마음조차 가늠할 수 없는 짝사랑의 경우에는 순간순간 위태로울 때가 많았다. 이전에는 혼자서도 잘해내던 일들이 누군가를 마음에 품은 순간부터는 혼자 하기 싫은, 재미없고 따분한 일이 되어버리는 일상의 균열은 혼자의 삶을 어려워해본 적 없는 내겐 참 힘들었다.
"좋아해. 맞아. 근데 억지로 몰아붙일 생각 없으니까 누난 지금처럼 그러면 돼. 나 누나 좋아하는 동안 힘들거나 그러지 않았어. 나 그렇게 애타는 사랑하는거 아니야. 사랑이 뭐라고 인생을 걸어. 쉬엄쉬엄했어. 그러니까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말라고."
요즘도 종종 다시 보는 '로맨스는 별책부록' 10화에 나온 대사다. 이 대사가 너무 좋아 몇 번이나 돌려보며 대사를 받아 적었다. 잊고 싶지 않았다. 이런 고백이 진짜 어른의 사랑 같았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좋아했고 그의 인생에서 그녀를 제외시키고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고백에 '쉬엄쉬엄'이라는 단어를 담아 마음을 표현했다는 것이 나에겐 충격으로까지 다가왔다.
저런 사랑은 무엇일까. 오래오래 그의 고백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마음에 담으면서도 삶을 단정하게 살아내는 것. 사랑을 져버리는 것도 그 사랑으로 온통 삶을 채우는 것도 아닌, 사랑이 인생의 다른 부분까지 훼손하여 무너지지 않도록 삶을 잘 지켜내는 것.
누군가를 좋아한다면서도 감정의 기복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아하게 여긴 적이 있었다.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맞나? 누굴 좋아할 때 그 사람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마음 정도는 먹어줘야 진짜 사랑 아닌가.
하지만 무언가를 그냥 꺼내놓는 일은 쉽다. 짝사랑을 하는 나의 힘듦을, 괴로움을, 너를 좋아해서 어쩌지 못하는 내 마음을. 지금 나의 감정만 중요한 상태가 되면 나의 감정에 반하는 모든 일들에 쉽게 적대적이 되기도, 쉽게 상처받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감정은 특히나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기에 나의 감정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오히려 그런 나의 마음을 정돈하고 상대를 살피는 것. 상대를 진정으로 아끼고 좋아한다면,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이 그토록 소중하다면 이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나에게도 쉬엄쉬엄, 너에게도 무겁지 않게 해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사랑이 전부여서 그 시기의 삶 전체가 사랑 때문에 고단하고 힘들게 기억되는 건 내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품고 살되 그 사랑이 해가 되지 않도록, 사랑이 있든 없든 내 삶을 풍성하게 가꿀 수 있어야 사랑도 덜 고통스러울 테니까. 진짜 어른의 사랑은 그 소중한 마음이 오래오래 잘 지켜질 수 있도록 마음 쓰되 내 삶을 내팽개치지 않고 잘 살아내는 일이라는 걸, 오늘도 드라마로 배웁니다...
다음 사랑이 찾아온다면 내 마음을 좀 덜 고단하게 쓰고 싶다. 삼순이는 엉엉 울며 아버지에게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심장 딱딱은 됐고 마음 수련을 통해 건강하게 말랑말랑한 심장 유지하며 저런 멋진 대사 술술 풀어내면 참 좋겠다(더 과한 바람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