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이 좋으신 것 같아요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던 날

by 오류 정석헌

"몰입이 좋으신 것 같아요."


출판사 미팅에서 편집자분께서 내게 해주신 말이다. 꿈같은 시간이었다.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던 것이 내 눈앞에 펼쳐지니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편집자분의 말처럼 2시간 30분이 15초처럼 지나갔다.


상암 MBC 1층 투썸에서 시작된 미팅이 끝나고 문을 열고 나오는데 정신은 몽롱했다. 차가운 곳에서 더운 곳으로 순간 이동하면 안경에 습기가 생기는 것처럼 내 정신에도 습기가 찾아온 것 같았다. 잠에서 덜 깬 상태의 몽롱함 20퍼센트, 술이 약간 취한 듯한 상태 40퍼센트, 멋진 영화를 감상한 뒤 빨리 이걸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답답함 40퍼센트가 뒤섞인 느낌이었다.


출판사 대표, 편집자 그리고 박요철 작가님과도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마지막으로 헤어지며 아쉬움을 눈인사로 전했다. 눈이 작아서 잘 전해졌는지는 모르겠다. 헤어지고 한참을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있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좀 더 여기서 머물고 싶었다. 이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서 기억하고 싶었다. 잠시 뒤면 사라질 것 같은 기억을 애써 붙잡고 싶었다. 내 발에 대형 껌이 붙은 듯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영화 촬영장에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이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카메라가 그 주위를 빙빙 도는 장면. 이 장면이 떠오른 건 지금 서있는 이 자리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가와서 일지도.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 수도 있단 걸 오늘 처음 경험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니 비는 그쳤고 파란 하늘이 내게 굿모닝 인사를 건넸다. 창문 틈으로 바람은 성큼 들어왔다. 출판사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고 건넌 가양 대교는 그 어느 때보다 멋진 풍경을 내게 보여줬다. 출판사 건물 1층 호두과자 가게를 지나가 살까 말까 망설이다 샀는데, 뭘 또 이런 걸 다 하시며 출판사 대표는 살짝 좋아했고, 해당 출판사에서 완성된 책을 가져갈까 말까 하다 가져갔는데 책을 꺼냈더니 대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으며, 출판사에 도착하니 대표가 자리를 비워 어색한 시간에 편집자와 단 둘이 잠시 있던 시간에 말할까 말까 하다가 어제 읽은 책 내용을 꺼냈더니 어색한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았고,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아서 양손 곱게 모으고 들으며 종이에 끄적이는 모습이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준 듯 칭찬도 받았으니까. 착각인 걸 알지만 이 착각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아니 지금 이 순간만큼은 착각에 만취하고 싶었다.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없다. 당연히 버스를 타고 내렸을 것이고 집까지 걸어왔을 것이다. 아, 하나 기억나는 게 있다. 내 옆자리 고등학생처럼 돼 보이는 여자 아이에게서 양파 냄새가 났다. 전화 통화를 잠시 엿들었는데 자리를 잡아 달라는 대화에서 게임방에 가는 듯 추측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과 옷을 내 던지고 방바닥에 누웠다. 샤워할 힘도 없었다. 지금 필요한 건 충전이었다. 미팅이 끝난 시간은 오후 5시 30분이었고 집에 돌아온 시간은 모르겠다. 복층 오피스텔 위에 높게 매달린 램프를 멍하니 바라보며 눈을 껌뻑거렸다. 곧 껌뻑 거림도 꺼질 것 같았다.


방대한 대화를 복귀해야는데 뇌가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대로 잠을 자는 일밖에 없을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꿈같은 오늘이 깨지지 않길 바라면서, 영원히 내 기억 속에 머물러 주길 바라면서, 가장 멋진 찰나의 순간이 '찰칵' 소리를 내며 카메라에 담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꿈속에서 영화 <내부자들>의 대사를 들었다. "영화 끝나면 알겠지. 지가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었다는 걸." 대사를 듣고 난 이렇게 말했다. "주연이 중요할까 조연이 중요할까. 주연이면 어떻고 조연이면 또 어떨까. 좋아하는 영화에 출연만 할 수 있다면 난 뭐든 상관없어"라고. 그리고 내 인생의 영화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저 멀리서 촬영 감독님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하이~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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