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헬스장의 VIP였다. 왜냐하면 기부 천사였기 때문이다. 등록할 땐 1년 등록하고 5번도 못 나갔다. 아니 안 나갔다고 해야 맞겠다. 이유는 많았다. 핑계는 만들려면 108가지도 넘게 만들 수 있었다. 날씨가 안 좋아서, 약속이 있어서, 갑작스럽게 일이 생겨서, 가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아서 등등. 옛말에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말은 꼭 나를 두고 한 말 같다.
헬스뿐만 아니라 난 어딜 가든 VIP였다. 귀가 얇아서 잘 속아 넘어가 지갑이 쉽게 열리는 사람이었고 그만두기를 금세 하기에 최우선 고객 대상이었다. 시작은 누구보다 쉽게 잘했고 포기하는 능력도 어디 내놔도 손색없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사람이 나였다. 그러니 상대방의 입장에선 이보다 더 좋은 고객은 없었다.
덕분에 시작만 하고 끝까지 해본 게 없었다. 시작만 하고 지금까지 계속하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그만 둘 때는 언제나 스스로 핑계를 만들어서 그만두었다. 좀 더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나는 자기 합리화의 달인이었다.
그런 내가 PT 50번을 모두 채웠다. 첫 PT를 받고선 언제 이걸 다 채우나 했었는데 정확히 어제 50번의 PT가 끝이 났다. 50번째 사인을 하면서 혼자 감동했다. 혼자 기뻐했다. PT가 한 번씩 진행될 때마다, 운동을 마치고 헬스장을 나올 때마다 매번 투덜 댔었는데 이젠 더 이상 투덜 댈 것이 없어졌다.
무엇보다 기뻤던 이유는 스스로 한 약속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만 두기 선수에서 벗어난 첫 번째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 그만두는 걸 제발 그만두자며 등록한 헬스였기에 좀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다. 이젠 끝까지 할 수 있는 것들이 내게도 하나 둘 생겨나는 것일까?
코치는 마지막 날이라며 전보다 강도 높은 훈련을 요구했다. 스쾃 20개씩 3세트, 스파이더 맨 스쾃 20개씩 3세트, 누워서 다리 들어 올리기 20개씩 3세트, 엎드려뻗쳐서 옆으로 다리 들어 올리기 20개씩 3세트를 해냈다. 이미 반팔 티셔츠는 1세트가 끝나자마자 땀으로 다 젖어있었다.
PT 50회를 하면서 밀땅의 고수가 되었다. 휴식 시간마다 난 코치에게 1분만 더 쉬고 하겠다며 이상한 제안을 서슴없이 하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나의 힘듦에서 벗어나고자 무지 노력했다. 참으로 쓸데없는 노력을 한 셈이다. 코치님이 하품을 하면 휴식 시간이 부족하다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제안했다.
코치는 언제나 단호하게 내 제안을 거절했다. 단 한 번도 예외는 없었다. 코치는 정말 단호박 같은 사람이었다. 코치는 이런 나를 억지로 어르고 달래면서 코치는 약속한 50분을 다 채웠다. 근데 이런 사람을 정말 나뿐일까. 나 같은 사람을 매일 상대하는 코치는 정말 강인한 정신의 스승님이다.
그러고 보니 약속을 다 지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코치 덕분이었다. 만약 나에게 코치가 없었다면 난 예전처럼 기부 천사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이제는 안다. 필요하면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필요하다면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필요하면 환경을 설정해야 한다는 것을. 혼자 두어서는 절대로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호박이 땅콩만 할 때, 통에 넣어두면 딱 그만큼만 자란다.
그런데 사람도 그렇다.
-존 맥스웰-
살은 빠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론 그랬다. 물론 빠진 적도 있었고 찐 적도 있었다. 살 대신 근육량이 늘었다. 체력도 늘었다. 늘어난 체력 덕분에 하루를 좀 더 활기차고 건강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결과는 처음 PT를 등록할 때완 다르게 나왔지만 괜찮다. 매번 PT를 받으면서 운동과 조금씩 친해졌고 그간 방치했던 내 몸에 근력을 선물했으며 무엇보다 의지력이 조금씩 상승함을 경험했다. 결과보다 과정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배웠다.
나는 더 이상 나의 나약한 의지를 믿지 않는다. 대신 환경을 믿는다.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세팅한다. PT는 끝났고 이제 남은 건 혼자 운동하는 것뿐이다. 다시 PT를 등록해야 하나 심히 고민된다. 일단 내일은 혼자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만약 이틀 동안 연속으로 안 가면 또 PT를 등록하리라 결심한다. 마지막 운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코치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커피 쿠폰 선물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