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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류 Jun 18. 2022

잊지 못할 웨딩카 사건

잘 난 친구를 덕분에 벌어진 일

일요일 아침, 어젯밤부터 친구들과 가평에 와서 명물 잣 막걸리를 마시고 푹 잠에 취해 늦잠을 자는데 초등학교 친구 진모가 전화로 나를 깨웠다. 잠이 한참은 덜 깬 목소리로 전활 받았다.  


“요~왔썹, 아침부터 웬일이야?”

“어, 언제 오냐?”

“어디를?”

“설마 또 잊은 거냐?”

“뭐를?”

“너 웨딩카 해주기로 했잖아? 몇 시에 오냐고?”

“... 그게... 오늘이었어?”

“...”

“끊어라.”

“진모야.... 미....” (뚝)


진모가 와이프를 친구들에게 소개하는 자리에서 나는 약속했다. 웨딩카를 해주겠다고. 진모가 해달라고 한 게 아니었다. 내가 해주겠다고 했다. 그런 나였기에 진모는 결혼식 웨딩카를 내게 맡겨 주었다. 그런 내가, 해달라고가 아니고 해 주겠다고 약속한 내가 그 약속을 잊고 말았다. 20대 때 나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마구 던지던 아이였다.  


약속을 잊어버릴 수는 있다. 많이 그러니까. 근데 이게 반복되면 문제다. 진모가 ‘또’라고 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난 자주 약속을 여겼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잊어버렸다는 핑계 카드를 꺼냈다. 그 카드는 처음엔 통했지만 횟수가 거듭될수록 효력을 잃었다. 신뢰도 함께.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수습하고 싶었다. 문제는 내가 지금 서울에 없다는 것이다. 가평에서 서울까지 지금 출발해도 1시간 반은 넘게 걸릴 것임이 분명했다. 서울에만 있었다면 어떻게든 수습이 가능했겠지만 내 몸은 지금 가평에 있다. 친구의 웨딩카 약속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친구의 웨딩카 약속을 잊어버릴 정도로 노는 데만 정신 팔려 있었던 나였다. 그것도 친구의 웨딩 하루 전날 말이다.


진모는 그냥 말없이 전활 끊었고 끊자마자 내 머릿속은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밤새 마신 술이 일순간 확 깼다. 생에 한 번뿐인 웨딩을 내가 망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신이시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사태 수습이 우선이었다. 나를 대신해 웨딩카를 해줄 사람을 구해야 했다. 누가 있을까. 누가 지금 신을 대신해 나를 구원해줄 수 있을까. 만약 지금 나를 구원해줄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 사람에겐 평생 빚을 갚겠다 결심했다. 순간 한 명이 떠올랐다.


그래, 진구가 있었지. 시티폰을 열어 진구의 전화를 또박또박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 뚜, 뚜, 뚜.”

받아라. 받아라. 받아라는 내 소망과는 달리 진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큰일이다. 한 번만 더 걸어볼까.


“뚜, 뚜, 뚜, 뚜.”


두 번째도 받지 않았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매초가 지나갈 때마다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가평에 같이 온 친구들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냐며 안으로 들어와 좀 더 자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아직 자는 친구들을 피해 밖으로 숙소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을 좀 쐬니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하늘은 이런 내 기분과는 별개로 티 없이 맑고 파랬다. 진구네 집으로 전화 걸어볼까? 아니면 다른 친구를 찾아야 하나? 집으로 전화하는 게 아침부터 민폐가 되는 건 아닐까. 일단 걸어나 볼까. 이것저것 따지고 볼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손은 바삐 진구네 집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뚜, 뚜, 뚜.....”

“여보세요?”

“저... 혹시 진구네 집 아닌가요?”

“누구세요? 아침부터.”

“저... 석헌인데요. 진구 일어났어요?”

“아... 석헌이가, 진구 지금 어디 간다고 씻고 있데이.”

“아 그래요? 진구 다 씻으면 저한테 전화 좀 걸어달라고 해주시겠어요?”

“그래, 알았다. 들어가라.”


10분이 지나도 전화는 걸려오질 않았다. 시티폰 배터리가 나갔는지 확인해봤지만 배터리는 난 멀쩡하다고 했다. 전화를 기다리는 10분이 8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간 지 내가 걱정이 되는지 함께 놀러 온 친구들이 무슨 일이 있는 거냐며 물었다. 난 별일 아니라며 라면이나 끓이라고 했다. 곧 들어가겠다는 거짓말도 덧붙였다.  


“띠리 리리~띠리 리리. 여보세요.” 진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미친놈, 잘한다.”

“전화받았어? 진모한테.”

“그럼, 받았지. 잘한다 아주.”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하기로 했지. 네가 하기로 한 거. 내가 대신. 아주 잘나신 친구를 둔 덕분에.”

“잘했네. 고맙다.”

“나한테 고맙다고 하지 말고 내 여자 친구한테 고맙다고 해라.”

“왜?”

“여행 가는 걸 취소했거든. 누구 덕분에.”

“정말? 미안하다 친구야. 덕분에 살았다.”

“미안하면 고기 사라.”

“응, 한 근 이라도 살게.”


진구 덕분에 다행히 한 숨 돌렸다. 진구는 정말 내 인생의 구원투수 같은 친구가 틀림없었다. 여행도 취소하고 나를 위해 웨딩카를 해준 멋진 친구다. 진구에겐 정말 평생 갚아야 할 빚이 하나 더 늘었다. 축가 실수를 포함해서 두 개가 됐다. 아니다. 세 갠가. 헷갈린다.


결혼식을 무사히 마치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 진모와 다시 만났다. 약속 장소에 나가니 진구와 진모가 나란히 나를 맞이했다. 두 사람은 나를 보면서 실실 웃었다. 나도 같이 실실 웃었다. 진모에게 연신 미안함을 표시했고 진모는 별일 아니라는 듯 괜찮다고 했다. 사과는 다음에 와이프에게 하라고 한다. 진모 자신은 괜찮은데 와이프가 너에 대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말이 더해졌다.


집들이할 때 내가 가서 다 설명하겠다고 했다. 용서를 받겠다고. 필요한 건 뭐든지 하겠다고 또 약속했다. 진모는 그러라고 했다. 그 뒤로 진모의 와이프는 만나지 못했다. 진모에게 전화해 언제 만나게 해 줄 거냐 물었지만 진모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 카드를 꺼내 들었다.


진모에게도 진모의 와이프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아픈 추억을 선물한 것이 바로 나다. 마음의 빚은 여전히 갚지 못했다. 언젠가는 갚아야지 하는데 갚을 길이 도무지 생기질 않았다. 코로나의 장기화로 진모를  만난지  지났는데 오늘은 전화를 걸어 안부라고 나눠야겠다.


‘진모야, 그땐 정말 미안했다.’


진모는 이런 나를 그래도 친구라고 받아주고 아직도 간간히 연락해주는 참 고마운 내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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