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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류 Jun 03. 2022

화려했던 과거로 돌아가려는 몸부림

비루한 현실 직시하기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에게서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술을 못 마시던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술을 잘 마시는 아이로 변했냐는 이야기였습니다. ‘내가 술을 못 마신 적이 있었나?’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여겼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빠는 술을 한 잔만 해도 얼굴이 벌개 지십니다. 남동생도 그렇습니다. 그나마 엄마가 식구들 중에서 가장 잘 마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해서 외식 자리에서 술을 한 병 넘게 시켜본 적이 없습니다. 아빠는 술을 한잔 마시면 하시는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만 자자.’ 그래서인지 드라마에서 아빠와 자식이 함께 술을 함께 마시는 장면을 보면 부러웠나 봅니다. 태어나길 술을 잘 못 마시는 유전자를 저도 물려받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서클 동아리 환영 파티가 있었습니다. 목동 사거리 어느 꼬치 집에서 졸업한 선배와 후배가 만났습니다. 자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선배와 일대일로 마주 앉도록 배치되었는데요, 선배들 앞에는 젓가락과 소주잔이, 저희 동기들 앞에는 맥주잔이 놓였습니다. 주문한 치킨이 나오고 환영 파티가 시작되었습니다. 선배들은 동아리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며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선배들은 소주잔에 술을 채웠습니다. 다 같이 건배했습니다. 그리고 원샷. 


TV에서 배우들이 소주를 마시고 입에서 ‘크아~’ 소리가 왜 나오는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태어나 처음 마셔본 소주는 썼습니다. 알코올 냄새에 절로 고개가 돌려지고 쓴 맛에 그냥 입이 벌어졌습니다. 한 잔은 어떻게 원샷을 했는데 다음 잔을 마실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선배들은 그런 저희를 앞에 두고 맛있게 치킨을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우리만 먹어서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갑자기 제 안에 어떤 용기가 생겼습니다.


‘선배님, 만약 제가 선배님하고 술 대결을 해서 제가 이기면 저희 동기들도 치킨 먹을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선배는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동기들을 대표해 제가 선배와 일대일 승부를 펼쳤습니다. 동기들은 할 수 있다며 저를 응원했습니다. 이윽고 대결이 펼쳐졌습니다. 한잔, 두 잔, 세잔, 넉 잔. 다섯 잔. 여섯 잔째 술을 따르다 선배는 저희에게 모두 젓가락을 주라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화장실도 후다닥 달려가 마신 걸 모두 게워냈습니다. 


대학 때도 그랬습니다. 신입생 환영 파티는 고등학생 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회생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술은 일종의 통과 의례처럼 느껴졌습니다. 못 마시는 사람에겐 비아냥거림이 쏟아졌고 잘 마시는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못 마시는 술도 꾹 참고 다 삼켰습니다. 술을 못 마시는 아이가 노력으로 잘 마실 수 있게 된다는 걸 몸소 경험한 셈입니다. 친구의 말을 통해 새삼 깨달았습니다.


“내가 인마, 어제도 느그 서장 하고, 어? 사우나도 가고, 같이 밥도 묵고, 어? 인마 다했어.” 


술을 마시면 화려했던 과거가 떠오릅니다. 내가 예전에는 이렇게 잘 나갔고 경험도 많고 아는 사람도 많고 그랬어하며 말이 많아집니다. 평소엔 내성적이고 조용한 내가 술을 마시면 다른 사람이 됩니다. 내 안에서 또 다른 내가 툭 튀어나옵니다. 


강신주 철학 박사는 이런 음주욕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비루했던 현실에서 벗어나 화려했던 과거로 돌아가려는 몸부림.‘ 맞습니다. 제가 딱 그랬습니다. 그래서인지 비루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계속 술을 마셨습니다. 비루한 현실을 잊고자 자주 술을 찾았습니다. 화려했던 과거에 접속하고자 술에 기댔습니다.


마실 때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술이 깨면 예전보다 더 비루한 모습의 저를 거울을 통해 만나게 되었습니다. 거울을 보며 저는 ‘으이그, 이기지도 못할 술을 또 마셨구나.’ 하며 자책하기를 반복했습니다. 누구보다 친절해야 할 저 자신에게 친절하지 못했습니다.


술을 줄였습니다. 한동안 매일 마시던 술을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 이 주일에 한번 정도 마십니다. 힘들 날 말고 가장 즐거운 날에 마십니다. 이제 저는 비루한 제 모습도 보듬어주기로 했습니다. 비록 지금 비루할지라도 계속 이렇진 않을 거란 걸 믿기 때문입니다. 술을 못 마시던 아이가 술을 잘 마시던 아이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이제는 비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람마다 꽃피는 시기가 다르고, 저마다의 걸음걸이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장 노력에 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언제 스스로 꽃 피울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처럼 그것을 미리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때가 찾아올 때까지 돌에 정으로 글씨를 새기듯 매일의 조금씩 저만의 일을 해나갑니다. 화려함은 꽃은 아닐지언정 저만의 꽃을 피우기 위해 노력합니다. 꽃 피워야 하는 건 언젠가 꽃 피리라는 걸 믿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저만의 속도로 그렇게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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