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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류 Jul 12. 2022

영업부서로 발령받은 첫날부터 틀리기 싫었다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일단 도망을 택했다

"안녕하십니까. 저 이번에 영업부로 발령받은 정석헌입니다."

"아......니가. 자리는 저기다 앉아라."

"아...... 네 감사합니다."

"자, 이건 선물. 이거 매뉴얼이다. 완벽하게 외아라. 틀리면 알제?"

"아...... 네."

"몇일만에 외울 수 있겠노?"

"네?"

"일주일이면 되겠제?"

"넵."


3년 동안 근무한 생산팀을 떠나 해외 영업부로 첫 출근을 했다. 발령받은 팀은 AEO다. AEO는 American Express Outfitters의 줄임말이고 왼쪽 가슴에 독수리 로고를 사용하는 미국 브랜드다.


"니 영어 잘하나?"

"아........ 니요."

"못한다꼬? 그럼 우째 근무할낀데. 여긴 다 영어로 업무를 봐야는데."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하나, 못하나?"

"잘할 수 있습니다."

"영어 이름은 뭐꼬?"

"저, 아직."


자리에 앉기도 전에 팀장님은 질문을 많이 했다. 배정된 내 자리는 창가 앞자리였다. 자리에 앉았을 때 팀장님은 내 왼쪽 대각선 자리다. 자리에 앉아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3월의 따뜻한 햇살이 한가득 들어와 부서 이동을 축하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난 속으로 '괜히 부서를 옮긴다고 했나.' 후회하는 중이었다.   


"자, 회의하자."


팀장님의 말 한마디에 내 옆 그리고 뒤에 앉아있던 6명 인원이 일제히 일어났다. 덩달아 나도 일어났다. 그리고 팀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니는 앉아 있으라. 닌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자리에 앉아서 우리 회의할 동안 전화나 받아라."

"넵."

"전화 잘 받고 메모해놔라. 갔다 와서 검사할끼다."

"넵."

"인사는 회의 끝나고 와서 하자."

"넵."


3월, 영업 3부, 생산부가 아닌 해외 영업부, AEO. 새로운 다짐. 새로운 시작. 난 한껏 기대하는 마음을 담아 목소리에 힘을 담아, 넵 이라고 당당히 말했고 팀원들은 회의실로 사라졌다. 생산부에서 했던 것처럼만 하면 돼 , 항상 최선을 다하면 돼라며 마음을 다독였다. 나만 혼자 남겨진 후 자리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눌렀다. 익숙하게 회사 아이디로 로그인하고 아웃룩을 실행했다. 메일함에는 발령 공고가 한통, 생산팀에서 공유된 메일이 20통쯤 있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 벨소리는 팀장님 자리에서 울렸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까 팀장님이 전화 잘 받으라는 말이 떠올라 팀장님 전화를 당겨 받았다.


"안녕하세요, 영업 3부 정석헌입니다."

"Hello, this is Chri........"

"여보세요."

"Hello, this is Chri........"


영어다. 영어 전화다. 잘못 걸려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맞다. 여기는 해외 영업부니까. 출근 첫날 받은 전화가 영어 전화라니 일단 큰일 났다. 영어 전화인 줄 알았으면 당겨 받지 않았을 텐데.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뭐라고 해야 하지. 갑작스럽게 받은 영어 전화에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어떤 답변도 떠오르지 않았다. 수화기를 왼손이 바르르 떨렸고 힘이 빠졌다. 손에서 힘이 빠지고 온 몸에 기운도 빠졌다. 툭, 왼손이 나도 모르게 아래로 떨어졌다.


전화를 끊었다. 아니 수화기가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전화를 끊었다. 팔에 힘이 빠져서 끊겼다. 분명 사고였다. 의도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다시 수화기를 들었는데 물론 뭐라고 한마디도 못했을 테지만 일단 들긴 들었는데 수화기에는 뚜 소리만 들렸다.


이미 벌어진 일이 되어 버렸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중요한 건 전화가 끊겼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팀장님이 전활 잘 받으라고 했는데 난 전화를 잘 받지는 못할망정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것도 발령받은 첫날에. 전활 받으며 숙였던 허리를 살짝 펴서 주변을 살폈다. 옆 자리 팀부터 8층 전체를 눈으로 스캔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업무에 집중해 지금 사건을 못 본 눈치였다. 사람들의 눈은 모두 각자의 모니터를 향해 있었고 무언가 열심히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전화가 또 걸려왔다. 이번엔 내 옆자리다. 설마 또 영어 전화겠어하며 난 당당히 또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영업 3부."

"Hello, this is Chri......."

"여보세요?"

"Hello, is there 혜진, Do you hear me?"


내 예상은 빗나갔다. 역시 또 영어 전화였다. 뭐라고 해야 하지, 아는 것도 하나도 없는데 뭐라고 답변해야 하지. 머릿속은 다시 하얘졌고 수화기를 든 왼손은 다시 또 힘이 빠졌고 난 또 수화기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답변할 자신도 없었고 무슨 말인지 통 알아들을 수 없었고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띠리리리, 띠리리리."


또 전화가 걸려왔다. 오 마이 갓, 신이시여. 어찌 첫날부터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두 번 연속으로 강제 끊김을 당한 바이어는 전화를 또 걸어왔다. 전화를 안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내가 여기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수화기를 드는 데.


"Yes, Hold on."

"영업 3부 아무도 없어요?"

"아, 전부 미팅 들어가셨는데요. 저는 신입입니다."

"아~."

"That's right but they..... on a meeting."


옆 팀 이대리가 나를 대신해 전화를 당겨 받아 주었다. 고맙게도. 난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그나저나 혹시 아까 상황을 그는 눈치채고 있었을까? 만약 알았다면 정말 큰일인데 하면서. 그나저나 또 전화가 걸려오면 더 큰일이 벌어질 게 분명한데 도대체 왜 회의는 안 끝나는 건지. 자리에 앉아 있는데 앉아 있는 게 아니었다. 손이 떨리고 다리가 떨리고 마음이 길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다.


안절부절 일어났다 앉았다 수화기를 쳐다봤다 안 봤다. 왜 첫날부터 해외에서 전화가 걸려와서 이런 상황이 생긴 건지, 마침 또 회의 시간에 이런 전화기가 걸려온 건지, 난 이런 날 영업부로 발령을 받은 건지. 할 수 있는 건 원망밖에 없었다. 그래서 원망 어린 눈빛으로 애꿎게 전화기를 쳐다봤다. 시간은 또 왜 이렇게 안 가는지 하면서. 전화기와 회의실을 번갈아 쳐다봤다.


"별일 없었제?"

"네, 별일 없었습니다."

"그래. 자, 여기는 이번에 새로 발령받은 정석헌 씨. 그리고 주임. 다들 인사해라."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팀장님의 사투리는 원망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9회 말 2 아웃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상황을 반전시켜줄 구원 투수가 등판한 느낌마저 들었다. 원망 어린 눈빛은 사라지고 반가움에 두 눈이 평소보다 두 배는 커져 팀장님을 바라봤다. 회의에서 나온 팀장님이 부서원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난 팀원들에게 웃으며 한 명씩 인사를 건넸다. 인사가 다 끝나고 다시 정적이 찾아온 바로 그때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아까 그 바이어는 아니길 바랬는데.


"띠리리리, 띠리리리."

"안녕하세요, 영업 3부, hello. yes. what? Sorry. meeting."


팀장님은 유창한 영어로 전활 받았다. 팀장님이 통화하는 틈을 타서 난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가는 척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시도했다. 발소리가 안 나도록 조용히 걷는데 오른편으론 팀장님이 지나가는 날 곁눈으로 주시하는 듯했고 아까 전활 대신 받아준 왼편 대리도 전화 통화 중이었다. 이런 걸 두고 완벽한 타이밍이라고 하던가. 빨리 이 순간을 모면하는 내 발이 더 빨라져 드디어 복도의 자동문 앞에 도착했다. 자동문이 열리는 순간 멀리서 팀장님의 소리가 작게 들렸다.


"어떤 놈이 나 없는 사이에 바이어 전활 끊었노? 어떤 놈이. 잡히기만 해 봐라."


영업부서로 발령받은 첫날부터 틀리기 싫었다.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일단 도망을 택했다. 아까 일은 없었던 생각했다. 기억에 Delete 버튼을 눌렀다. 만약 팀장님이 물어보면 시치미를  작정이었다. 물론 완벽한 표정 연기까지 선보이면서. 내가 생각해낸 방법은 고작 그것뿐이었다. 그나저나 당장 영어 회화 학원부터 알아봐야  상황이다. 앞으로의 회사 생활이 편해지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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