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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류 Jul 16. 2022

자꾸 말 두 번씩 하게 할래?

두 번씩 말 안 하게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곳 어디 없나요

"Dear 쓰고 Hi 쓰지 마라."

"네?"

"자꾸 말 두 번씩 하게 할래? Dear 쓰고 Hi 쓰지 말라고."

"네."


식은땀이 흘렀다. 새로운 부서로 출근한 지 두 번째 날 아침이었고, 아침부터 1시간도 안되어 지적을 다섯 번 받았던 상태였다. 왜요 라는 질문이 목구멍 앞까지 도착했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내뱉는데 실패했다. 물었다가 또 다른 지적을 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질문 대신 삼키기를 택했다. 


그때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속에선 '분명 전달받은 매뉴얼대로 메일을 보냈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니' 하며 불평의 목소리가 내 안에 가득 찼다. 부글부글 알 수 없는 끓어오름이 팀장님을 노려보는 눈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이대로 노려보다간 속 마음이 들킬 것 같아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말았다.  


자리에 앉는데 옆자리 김대리가 종이 하나를 말없이 내게 건넨다. 종이에는 노란색 형광펜으로 하이라이트 표시가 되어 있었다. 종이를 건네는 김대리의 눈에서 무언의 응원과 아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눈으로 하이라이트를 빠르게 훑었다. 


Dear H&K Logistic


I'm sending samples for S/# 519723 via DHL. 

AWB is 12345678.  

Pls. note and confirm receipt.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이메일이었다. 빈 샘플 파일을 하나 꺼내 제일 앞 종이 비닐에 넣어 보관했다. 앞으로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려는 요령이었다.  


생산팀에서 몸으로 일하던 때가 그리워졌다. 해외 영업부의 일과는 전화 업무 20퍼센트, 이메일을 회신 50퍼센트, 회의와 샘플 준비 30퍼센트로 이루어져 있었다. 생산팀에선 포천, 안산을 줄기차게 돌며 공장을 누비던 때와는 정반대의 삶이었다. 가끔은 휴게소에 차를 세워두고 낮잠을 자던 달콤한 휴식도 현장 사람들과 부딪히며 땀 흘리는 기쁨도 영업부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하루 종일 거의 입을 다물고 지낼 수밖에 없던 상황이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계속 부채질을 했다. 외근이 간절했다. 아니, 이곳만 아니면 어디든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이러려고 생산팀에서 영업부로 온 게 아닌데 하는 자괴감과 적응 하나 제대로 못하는 내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석헌, 잘하고 있냐?"


혼자 시무룩해져 자리에 앉아 멀뚱멀뚱 모니터만 보고 있는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 돌아봤더니 생산팀 성대리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포옹이라고 하고 싶을 만큼 반가웠다. 반가움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샘플을 가져온 성대리는 AEO팀장님께 가볍게 목례하고 내 뒷자리 테이블에 원단 1 롤을 올려놓았다. 난 성대리의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못했다. 눈으로 '제발 나 좀 다시 데려가 주세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니, 다시 생산팀 갈래? 보내줄까?"


깜짝 놀랐다. 속마음을 들킨 듯 두 배쯤 커졌다. 당시 상황을 몰래 지켜보던 팀장님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네~.'라고 하고 싶었는데 진짜 네라고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다. 대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라고 했다. 


뭐가 아니란 건지, 뭐가 괜찮다는 건지. 답변을 하고도 알 수 없었다. 속시원히 말도 못 하고 솔직하게 대답도 못하는 나란 인간. 빨리 퇴근 시간이나 됐으면 했다. 물론 퇴근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퇴근을 안 하겠지만. 


"니는 당분간 메일 쓰지 말고, 스타일별로 메일 온 거 전부 출력해서 파일에 꽂아 놔라."


아침에만 7번째 잔소리를 들었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별거 없었다. 욕 나오는 걸 참고 웃으며 대답하는 게 사회생활이었다. 잔소리 유발러였던 나는 그렇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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