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끈
살아있는 사람 책을 만났다. 어제 일이다. 20명이 합정동 어느 작은 지하 스튜디오에 모였다. 신정철 작가가 만든 <성장판 독서모임> 5주년 파티를 축하하기 위해서다. 어제 느낀 열기는 아직도 내 안에 가득하다.
모임 시작은 자기소개였다. <성장판 독서모임>에는 전매특허 자기소개가 있다. 3가지 키워드로 나를 소개하는 것이 그것이다. 4년째 매번 모임에 참석했지만 여전히 내게 자기소개는 힘들다. 부끄럽기도 하고 내세울 것이 없기에 피하고만 싶고 안 하고만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어떻게 나를 소개하지? 요즘 난 무얼 하고 있지?' 자기소개란 단어를 듣자 머릿속이 이런 질문들로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씩 소개가 이어졌지만 나는 도통 사람들의 소개에 귀 기울이지 못했다. 사람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고 나는 오직 나를 어떻게 소개할지만 고민했기 때문이다.
머릿속 생각을 멈추고 내 앞에 보이는 수성펜을 짚어 들었다. 빈 종이 하나에 낙서를 시작했다. 독서 모임에서 경험한 내용만 써보자 생각하니 써졌다. 내가 뽑은 3가지 키워드는 메모 독서, 감사 일기, 비트코인이었다. 키워드가 정리되니 떨리는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종이에 적은 키워드는 일종의 방향타였다. 말을 하다 보면 산으로 항상 산으로 가는 정상궤도로 올려주는 방향타가 바로 키워드였다. 덕분에 안심했다.
마지막에서 3번째로 자기소개를 했다. 내 소개에 정신 팔려 앞서 소개했던 17명의 소개를 전혀 듣지 못했다. 마이크 받아 들긴 들었는데 오른손에 힘이 전혀 들어가질 않았다. 마이크를 쥔 오른손이 심하게 좌우로 흔들렸다. 흔들리는 오른손을 가리려 왼손을 끌어다 힘을 보탰다. 마이크를 양손에 쥐고 몸 쪽으로 세게 당기며 겨우 입을 뗐다.
"안녕하세요. 정석헌입니다."
다음 말, 인사를 시작했는데 다음 이을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3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멍한 눈동자가 방향을 잃었다. 사람들의 모습이 흐리멍덩하게 보였다. ‘메모. 메모를 보라고. 방금 메모한 거 그걸 읽으라고, 그걸 얘기하라고.’ 내 속의 아우성을 듣고야 겨우 정신을 차려 말을 이었다. 독서 모임을 4년이 했는데도 자기소개는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메모를 하지 않았다면 난 오늘도 가사를 잊어버린 가수처럼 망신을 당했을지 모른다. 메모는 정말 내게 없어서는 존재다. 잘 잊어버리는 나에게 메모는 구원투수다.
자기소개가 끝나니 그제야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렸다. 참석자들이 독서 모임에 들어온 계기는 모두 달랐다. 우연히, 검색하다가, 필요함을 느껴서, 누구의 소개로, 강의를 듣다가. 시작한 이유는 달랐지만 모인 이유는 같았다. 각자의 삶을 살다, 온라인만 말을 섞다, 실제로 만나 마주 보고 나눈 이야기는 그 자체로 활력이었다. 한마디 한마디는 서로에게 에너지를 전달하는 행위였다. 독서 모임을 만든 신정철 작가는 중국 출장 중에도 시간을 내어 줌으로 참석해 많은 이들에게 응원을 보내주었다.
진주에서 올라온 사람도 있었다. 그는 3시간을 남들보다 먼저 출발했고 3시간을 남들보다 늦게 귀가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을 해냈다. 모임을 위해 올라온 정동준 님은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오고자 하는 마음 하나만 있으면 거리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얘기를 듣는데 가슴이 따끔거렸다.
뜻밖의 선물도 받았다. 책 교환 이벤트에서 책을 한 권 선물 받았고 다른 선물도 받았다. 아름 선생님은 전날 사람들에게 기억될 좋은 문구를 직접 손으로 써서 코팅까지 해오셨다. 문구에는 당신을 응원한다는 각기 다른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고마움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음을 아름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태원님은 모임 시간보다 일찍 오셔서 합정 교보문고에서 신 작가님의 책을 직접 구매해 나눠주기도 하셨고 그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뜻밖의 깜짝 이벤트도 마련해주셨다. 5장의 편지 봉투에 담긴 고마움은 5명의 사람에게 또 다른 행운이 되었다.
매번 받기만 한다. 독서 모임 자체가 선물인데 이곳에 오면 많은 걸 얻어간다. 힘이 되는 좋은 문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최신 신간 소식 그리고 다양한 시각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큐레이팅 된 귀한 정보들이 이곳에는 넘쳐난다.
하나의 모임이 만들어지기까지 여러 수고가 들어간다. 모임은 언제나 수고한 이들 덕분에 만들어진다. 모임 날짜 선정, 장소 물색, 장소 선정, 장소 임대, 음식 고민, 음식 준비, 모임 이벤트 고민, 이벤트 선정, 모임 진행, 모임 홍보.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은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해낸다. 이런 수고가 모여 모임이 만들어진다. 이 글을 빌어 뒤에서 수고한 이들 모두에게 감사를 표한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는 끈이다."
-랄프 왈도 에머슨-
책에는 사람이 꼬인다. 에머슨의 말처럼 책은 사람을 이어주는 끈이다. 사람을 이어주는 끈 덕분에 지금 삶도 살아볼 만하다. 이번 생에 가장 잘한 일 하나를 꼽자면 바로 독서 모임에 참석한 일이다. 4년 전 우연히 알게 된 독서 모임이 삶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앞으로도 함께하고 싶다.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는 <성장판 독서모임>과 함께, 계속 이들과 함께 성장을 이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