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이트쌤 Feb 27. 2023

선생님 밤길 조심하세요

일진을 가르치고 등골 오싹했던 퇴근길

지금이야 나도 가정이 있기에 늦게까지 강의하고 있지는 않지만 결혼 전에는 중학생들 가르치는 입시학원에서 꽤 오랫동안 일했었다.


그 당시 근무했던 학원은 초등관과 중등관을 같이 운영하던 원장님께서 나에게 중등관 영어 전임을 맡기게 되면서 초등반 수업은 완전히 손을 뗀 후 중등반 수업만 하고 있을 때였다.

요즘은 학원에서도 전자출석부를 사용하지만 당시만 해도 종이로 출력해서 파일에 매월 묶어놓고 종이 출석부에 일일이 체크를 하면서 출석 확인을 했었다.  

그런데 학원 출석부 명단에는 이름이 있는데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학생이 있었다.

근무한 지 몇 달이 지난 상황이었는데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학생이어서 이상해서 원장님께 다니고 있는 학생이냐고 물었다.

"선생님 그 학생은 그냥 신경 안 쓰셔도 되니까 내버려 두세요. 다니고 있기는 한데 어쩌다가 한번 나올 거예요."

"그러면 등록되어 있는 게 맞다는 거죠? 그런데 왜 여태 한 번도 출석을 안 했어요?"

사연을 들어보니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아이가 학교 일진이었고 여기저기 하도 사고를 치고 다녀서 엄마가 학원에 가서 공부 안 해도 좋으니 앉아만 있으라고 등록을 했는데 아예 나오지를 않고 있는 상황이었. 그래서 한 번도 얼굴을 볼 수가 없던 것이었다. 원장님께서 나오지도 않는 학생을 매달 학원비 받기가 민망해서 환불해 드릴 테니 카드 가지고 나오시라고 어머님께 전화했더니 공부 안 해도 되고 한 달에 한두 번만 나가도 되니까 받아달라고 사정을 하셔서 등록을 해주기는 했지만 학생 본인이 학원에 나올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같은 학교 다니는 애들한테 '김 OO'학교에서 만나면 영어 선생님이 학원 좀 나오라고 했다고 전해달라고 몇 번이고 부탁을 해놨더니 어느 날 아이가 학원을 나왔다.


"아이고 그 귀한 얼굴 언제 보나 했더니 이제 나왔네. 넌 대학생인 줄 아니? 대학생도 너처럼 제멋대로 학교 다니지 않아. 그렇게 다니면 학점 펑크 나는데 넌 대학생보다 더하는구나"

강의실에 들어 김OO은 머쓱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후에 벌어졌다.

맨 뒷줄에 책도 없이 와서 앉아있길래 교재 복사를 해주고 풀라고 나눠줬던 걸 조각조각 찢어서 아이들에게 수업시간 내내 던지는 게 아닌가!

어이가 없어서 수업시간에 뭐 하는 짓이냐며 야단을 치고 문제 안 풀어도 되니까 복사해 준 거 찢지 말고 가만히 앉아있으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지우개를 손톱으로 후벼 파서 다른 애들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수업에 방해가 되었고 강의실 바닥은 온통 종이 쪼가리와 지우개 부스러기로 엉망이 된 상황이었다. 하지 말라고 열 번도 더 주의를 주다가 말을 듣지 않아서 김OO에게 한마디 던졌다.


"너는 그래도 네 앞길 걱정해서 자주 나오지도 않는 학원 앉아만 있으라고 등록한 엄마 생각은 안 하니? 아무것도 안 해도 상관없으니까 앉아만 있게 해달라고 학원에 사정하신 엄마를 봐서라도 너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네"

나만 혼자 열받아서 따발총처럼 잔소리를 퍼부었는데 정작 학생은 별로 타격을 받지 않은 표정으로 짧은 대답만 하고는 나를 보고 가소롭다는 듯 실실 웃으며 나머지 시간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맨 뒷자리에 앉아서 내 얼굴만 쳐다보며 실실 웃고 있는 아이의 표정이 나를 더 열받게 했지만 공부하려는 다른 아이들도 강의실에 있으니 더 이상 수업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꾹꾹 참고 수업을 끝냈다.


수업이 끝나자  김OO은 학원을 재빨리 탈출했고 나머지 아이들 내가 걱정됐는지 쉬는 시간에 한 마디씩 거들었다.

"선생님 그냥 내버려 두세요. 쟤는 학교 선생님들도 포기했어요."

"쟤 형도 저희 학교 졸업생인데  유명한 조폭이에요. 쟤는 형 믿고 저러고 다니는 거예요."

"쟤는 운동장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도 교장 선생님 말고는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요."

"그건 학교 선생님이 잘못하시는 거지. 학생이 잘못된 행동을 하면 바로잡아줘야지."

아이들과 쉬는 시간에 김OO에 대한 만행을 듣고 있자니 더 황당했는데 한 남학생의 걱정이 나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선생님 학원 수업 끝나면 밤에 퇴근하시는데 밤길 무섭지 않으세요? 쟤가 어디서 나타나서 해코지하면 혼자서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하세요. 남자 선생님들도 쟤 감당 못하는데 쟤 눈에 젊은 여선생님이 얼마나 우습게 보이겠어요. 부모님들끼리 서로 아는 사이여서 쟤네 형을 제가 아는데 우습게 볼 일이 아니에요. 김OO 패거리도 문제지만 쟤네 형은 진짜 조폭이에요. 선생님 밤에 어디로 끌려가서 험한 일 당하실 수도 있어요."

그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이들의 표정에서 괜히 겁주려는 게 아니라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서 해주는 말임을 느낄 수 있었고, 또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기에 아이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래 알았어. 선생님도 조심할게."


그날 이후부터 퇴근길이 은근히 신경 쓰여서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건너편에 있는 파출소를 나도 모르게 흘끔거리게 되었다. 다행히 그 학원을 퇴사하는 날까지 큰 문제없이 출퇴근을 했고, 아이들의 충고를 새겨듣고 김OO이 수업에 어쩌다 한 번씩 들어오는 날에는 적당히 잔소리를 했다. 그 당시에는 내가 무슨 열혈교사라도 되는 마냥 애를 꼭 수업에 참여하게 해 보겠다고 학원 나오라고 잔소리를 계속했는데 다행히 그게 조금은 먹혀서 한 달에 한두 번 나오던 애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학원에 나왔다. 다른 학생들이 해줬던 충고가 걸려서 심하게 하지는 않았고, 그 학원을 그만두는 날까지 매일밤 퇴근할 때마다 여차하면 파출소로 뛰어가려고 가방을 꼭 쥐고 항상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